교육 목회를 실천한 김대인 목사의 사역
Pastor Kim Dae-In’s Works for Educational Ministry
*한국목회자들의생애와신학
*발제자: 조직신학 3 조하식
***********************************< 목 차>**********************************
1. 성장 배경 및 사역 과정
2. 교육 목회의 내용
3. 한국 교회사 연구
4. 교회 유적지 탐방
5. 설교의 세계
6. 나가는 말
*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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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장 배경 및 사역 과정
변함없이 칼빈주의 신앙의 전통을 지킨 김대인(1931~2007) 목사는 특별히 1986년을 자신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예정된 해로 여겼다. 그해 3월 1일 고향에 ‘안악읍교회’(후에 ‘귀담뒤교회’로 개칭)가 세워졌기 때문이다. 조부 김용제가 복음을 받아들여 증조부를 비롯한 온 식구가 주님을 영접한 이후 유복한 환경에서 외아들로 태어났지만 늘 일가친척에 둘러싸여 외롭지 않은 유년을 보냈으며, 교회 설립에 힘을 보탠 조부의 올곧은 삶을 본받아 목회자로서의 바탕을 닦을 수 있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서 매사 언행이 바르고 매우 사교적이었던 조부 김용제는 조카 김홍량, 최명식 등과 함께 1906년 양산학교를 세워 애국계몽운동에 참여했고, 김구의 「백범일지」의 기록에 따르면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7년 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그 뒤 해방과 함께 북한에 김일성 정권이 들어서고 전 재산을 몰수당하면서 1948년 삼팔선을 넘어 월남하게 되었다.
1) 하나님과의 만남
남한으로 내려온 후 소년 김대인은 경신고등학교에 편입해 공부를 계속했다. 그의 발목을 잡은 것은 지독한 질병과 6•25전쟁이었다. 테니스 선수로 발탁되어 맹훈련하던 중 결핵성 관절염의 발병으로 인해 운동을 중지한 데다가 갑자기 터진 동족상잔의 비극은 인생의 여정에서 가장 어두운 시기를 여는 서막이 되었다. 병마와 사투를 벌이는 가운데 1951년 1•4후퇴의 대열에 합류했고, 대구에 머물며 받은 진단은 6개월 시한부 선고였다. 피골이 상접한 몸을 이끌고 거처를 진해로 옮긴 뒤에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맹장이 파열하여 복막염이 되는 바람에 더는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영육 간의 황무지에서 헤매던 차에 마지막 기도를 드리겠다며 어머니께 도움을 청했다. 그의 기도는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살리실지 죽이실지를 알려주신다면 친척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저 천국에서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며 살아계신 주님을 증거하고 싶다는 게 요지였다. 애타게 매달리며 만약 살려주신다면 평생을 전적으로 예수님을 위해 바치겠다는 항복 선언이었다.
1952년 10월 어느 날 저녁, 죽음의 문턱에서 드린 기도의 응답은 곧바로 그날 밤에 임했다. 신비한 환상 중에 침상에 있던 그에게 하늘에서 한 분이 내려와 한 손으로 자신의 머리칼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배를 누르면서 급히 일으켜 앉히더니 “너는 이렇게 일어날 것이다”라는 말을 듣게 하였다. 기도를 계속하는 가운데 여러 모양과 통로로 소생의 날짜를 12월 3일로 예정하심을 깨달은 그는 12월 2일 저녁부터 금식하며 부모님을 비롯한 친척과 교회 권사 두 분과 함께 찬송을 부르며 밤새 기도회를 진행했다. 김 목사는 훗날 이때를 자기 생애에서 가장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했던 기도의 자리였다고 회고한다. 그러나 자정이 넘어서도 아무런 변화가 없자 권사 중 한 분이 다가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날이 되었으니 이제는 네가 그 말씀을 믿고 일어서야 한다”라며 어깨 밑으로 손을 넣어 일으켜 보려 여러 차례 시도하는 도중에 갑자기 캄캄하던 눈앞이 환해지면서 저 멀리 하늘에 무언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어떤 분이 큰 책상 앞에서 무언가 간절히 기다리는 것처럼 보이기에 한참을 기다렸으나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는 걸 보고는 체념한 듯 책상 끝에 조그만 항아리를 밀쳐놓았는데 어렴풋이 실낱같은 연기가 피어오르며 차츰 굵기를 더해가는가 싶더니 연기가 위로 솟아오르는 게 아니라 밑으로 내려오면서 중간쯤에서 온 하늘을 뒤덮을 만큼 큰 구름이 되었다.
그 순간 중환자 김대인은 저 구름이 나에게 내려오기만 한다면 능히 일어설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감으로 더욱 간절히 기도하는데 다시 눈앞이 캄캄해지고 말았다. ‘아! 이제는 절망인가 보다’라는 허탈감에 허공을 향하여 소리치며 기도하고 있을 때 불현듯 “너도 죄인이다”라는 음성이 귓전을 울렸다. 그는 이성을 잃고 눈물을 흘리며 지은 죄를 회개하는 가운데 몸부림치며 큰소리를 질러대기도 하였다. 그렇게 얼마간 시간이 흘렀을 때 하늘에 넓게 흩어져 있던 구름이 순간적으로 한군데로 모이면서 벼락처럼 그에게로 떨어졌다. 그것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스치고 지나가니 무거운 몸이 한순간에 날아갈 듯 가벼워지며, “나 일어날 수 있다”라고 외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는 걸 지켜본 권사가 “하나님께서 일으켜 세워주셨을 때 믿고 일어서서 걸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 음성이 마치 ‘지금 일어나 걸으라’는 주님의 명령처럼 들리면서 부축을 받아 일어서 한 걸음씩 발을 떼어놓으니 창문 너머로 가로수가 보였고 사람들이 지나갔다. 3년 동안을 식물인간처럼 누워있던 사람이 무덤을 박차고 나오듯 다시 세상과 만난 그날의 감격과 희열은 이후 김 목사에게 어떠한 역경에서도 오뚝이처럼 일어나 전진할 수 있는 능력의 원천이 되었다. 그는 목발을 짚고 일어나 지팡이를 짚고 걸을 수 있을 만큼 상태가 호전되었다. 하나님의 크신 능력에 힘입어 덤으로 받은 인생을 살기 시작했다. 목사 김대인은 늘 그 소생의 순간들을 결코 잊을 수 없다고 말하곤 한다.
2) 목적을 아는 삶의 시작
거의 죽다가 살아난 김대인은 하나님의 종이 되어야겠다는 분명한 목적의식을 갖고 이전과는 다른 마음가짐으로 성경 읽기를 시작했다. 그에게 다가온 말씀은 꿀맛처럼 달아 가죽 표지가 떨어지는 것조차 모를 정도였다. 신학교 입학 전까지 70회 이상을 통독한 영적 자양분은 45년간의 목회 인생에서 큰 힘이 된다. 성경 외에 탐독한 칼빈의 기독교 강요와 구로사키 코우키치의 신약성서 주해 역시 황무지 같던 그의 영적 토양을 기름지게 바꿔 주었다.
전쟁이 끝난 후 그는 부모님을 따라 금촌으로 생활 터전을 옮긴다. 거기서 금촌장로교회를 섬기며 신학 공부를 시작했고, 1957.4.6. 부활주일에 파주의 갈현교회 전도사로 목회자로서의 첫발을 내디딘 뒤 1960년 성북교회에서 현재의 사모를 만나게 된다. 1961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신학교를 졸업하면서 그해부터 안면도의 복도교회를 시작으로 1966년 서천의 석촌교회, 1968년 김제 영광교회에서 농촌 목회를 이어갔다. 1971년 서울 종로의 평창교회로 임지를 옮긴 김 목사는 1977년 화곡동의 한 상가에서 ‘성인교회’를 개척했으면서도 시간을 내어 1982년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목회신학원을 마쳤다.
3) 교회 성장과 예배당 건축
의자도 없이 돗자리와 방석 30개로 시작한 성인교회는 3개월 만에 주일 예배 인원이 60명에 이를 만큼 성도들이 늘어갔다. 그는 전혀 믿지 않는 사람에게만 복음을 전한다는 원칙을 고수했다. 밖에서 예배를 드리는 신도가 늘어나자 그해 8월 100여 평의 대지를 구입해 성전 건축에 착수했다. 그러나 초신자들에게 재정적 부담을 주면 신앙이 자라는 데 걸림돌이 된다는 생각에 건축헌금을 따로 만들지 않았다. 하나님은 여러 방식으로 도우셨고, 믿지 않는 이웃을 통해서도 건축 자금을 마련할 수 있었다. 성인교회가 급성장한 배경에는 잃어버린 자녀를 찾으시는 성령님의 계획과 은혜가 숨어있었다. 김 목사 부부는 해가 지도록 갈급한 영혼을 만나는 일에 매달렸다. 화곡3동은 복음을 향해 준비된 밭이었다. 설립 2주년을 기념하여 성인교회는 서둘러 사회복지관을 개설했다. 그 사업의 일환으로 선교원과 경로대학에 이어 어머니 교실을 열었다. 어떠한 경제적 어려움도 두 사람의 열정을 식히지는 못했다.
예배당을 건축한 지 3년 만에 더 이상 증가하는 교인을 수용할 수 없게 되었다. 고심 끝에 1987년 5월에는 목동 신시가지 종교부지로 이전을 결정하면서 새롭게 목동제일교회의 시대를 열기는 했으나 그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예배당 신축을 위해 상가를 임대한 기간이 3년을 넘기며 성도들의 믿음과 교회 재정이 바닥 수준까지 내려갔다. 엄청난 시련에 봉착한 김 목사는 두 주간 기도원을 찾아 주님께 부르짖었다. 며칠 후 문득 떠오르는 한 사람이 있었다. 쌍용양회주식회사의 최탄 이사였다. 아직 불신자이긴 했으나 아내와 친척으로서 화곡동 예배당 신축 때 지대한 관심을 보이던 게 생각나 도움을 요청했다. 그는 김 목사의 확고한 의지를 확인한 뒤 철근과 시멘트를 2년간 외상으로 대주는 조건을 제시했다. 하지만 그 또한 총건축비의 1/3에 지나지 않았다. 나머지는 때를 따라 역사하시는 우리 주님께 맡기기로 했다.
4) 교육 목회의 보람
사실 목동제일교회의 부흥은 1980년대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났던 한국교회의 폭발적 성장에 기인한 측면이 있었다. 하지만 목사 김대인의 목회 과정은 남달랐다. 그는 복음 전파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기 위해 자기 스스로를 날마다 새롭게 하는 일에 게으르지 않았다. 그가 깊이 고민한 지점은 성장하는 교회가 지향할 믿음의 뿌리였다. 평창교회 시절 청년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며 그들의 신앙적 현주소를 정확히 파악한 터였다. 대안은 교육 목회였다. 그는 진정한 신앙은 어떤 신비한 체험보다 말씀 공부에 있다고 확신했던 것이다. 그것은 화곡동 개척교회 때부터 초신자들을 양육한 원칙이기도 했다. 그것이 바로 평신도 교육의 출발점으로 삼은 L.T.C.(Leadership Training Course)라는 교육 자료다. 이는 개척 초기 결신율(決信率)을 80%까지 높이는 데 기여했다.
그뿐만 아니라 김 목사는 저녁 예배시간을 이용해 신구약 개론과 더불어 박형룡 박사의 조직신학을 강의했다. 성도들의 신앙 수준을 고려하라는 동료 목사들의 충고도 있었으나 올바로 가르쳐서 바르게 믿도록 하는 것이 옳다는 신념을 지켜나갔다. 예컨대 자칭 하나님과 직통 대화를 한다는 자에게 사기를 당한 부부를 신실한 성도로 인도한 일을 비롯해 치유 사역에 대한 과신에 빠진 농촌 신자들에게 말씀 중심의 신앙을 심어주는 일에 집중함으로써 올바른 믿음의 길로 들어서게 하는 데 목회의 보람을 느꼈다. 물론 자신의 몸에 남겨진 신유의 은사를 간증하면서도 하나님을 직접 만난 극적인 체험보다 말씀에 기초한 순전한 신앙이 우선이라는 소신에서였다. 단지 믿음이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차원이거나 나의 소원 성취를 위한 수단에 머물러서는 성경에 입각한 참 신앙을 가질 수 없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는 교육 목회를 통해 성도들의 변화를 확인할 수 있다는 데 보람을 느꼈던 것이다.
5) 성공한 목회의 잣대
목동 예배당 완공을 앞두고 있던 어느 날 한 목사로부터, “목사님은 목회에 성공하셨습니다“라는 칭찬을 여러 번 듣고 나서 이는 격려와 용기가 아닌 오히려 실망과 혼동을 안겨주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사람들을 많이 끌어모아 큰 건물을 짓는 일이 목회 사역의 과정에 필요한 일일지언정 영혼 구원과는 직결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주님이 보시기에 목회의 성공은 외형적인 교회당 건축에 있는 게 아니라 죽어가는 영혼들을 사랑하고 구원신앙의 정립을 통해 그들을 사회의 일원으로 바로 세우는 일이라고 여기실 터였기 때문이다. 그가 지향한 목회의 성공은 줄곧 한국교회를 망쳐온 물량주의에 있지 않았다. 김대인 목사는 2001년 정년 퇴임한 후에도 캐나다로 건너가 이민교회의 강단을 섬기며 한인신문 칼럼을 통해 황해노회의 역사와 믿음의 유산을 알리는 일에 힘쓰다가 2007년 76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2. 교육 목회의 내용
목회자 김대인은 칼빈주의 신앙을 바탕으로 성도들을 교육하고 그들에게 올바른 교리를 가르쳐 평신도 지도자로 육성하고자 하였다. 문제는 전도할 때 조직신학의 이론서를 직접 사용하기 어렵다는 데 있었다. 그가 1997년 「평신도 교육 길라잡이」라는 책을 출판한 이유였다. 본 교재를 통해 제시한 ‘지도자 훈련과정’(L.C.T.)은 다음과 같다.
1) 기초교육편
이 책은 세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첫 기초교육편은 교육생들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영접하도록 인도하는 데 초점을 두었다. 교육을 받은 성도들이 전도할 때 사용하는 교재는 사영리와 성령 소책자로 두 가지 목적이 있었다. 하나는 교육생들에게 말씀에 기초한 구원의 확신을 심어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성도들의 인격이 그리스도를 닮도록 돕는 일이었다. 맨 먼저 다룬 내용은 창세 전에 맺은 구약 언약의 당사자가 성삼위, 즉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적시하고, 그 대상자는 예정과 선택을 받은 자라는 사실과 함께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으로 나누어 설명했다. 거듭난 교인이 아니면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을 성부가 계획하신 구원을 성자가 이루시며 성령이 적용하신다는 말로 쉽게 풀이했다. 김 목사는 예정론에 입각해 성삼위 하나님의 구원론적인 사역을 구원 언약이라고 정의하여 가르쳤다.
(1) 사영리 교육 요령
기초교육의 첫 번째는 사영리의 내용을 칼빈주의적으로 제시하며 피교육자 자신에게 적용하도록 했다. ”당신을“이라는 표현을 ”나는“이라고 바꿔 스스로 예수님과의 만남을 현실감 있게 정리하고 점검하면서 전도의 필요성을 깨닫게 하였다. 가령, 요한복음 3장 16절이 중요한 까닭은, 첫째 하나님은 구원의 주체이시고, 둘째 세상은 구원의 대상이며, 셋째 사랑은 구원의 동기이고, 넷째 독생자를 주심은 구원의 방편이며, 다섯째 믿음은 곧 구원을 얻는 방법이고, 여섯째 영생은 구원의 결과라는 내용이다. 요한복음 10장 10절에 대해서도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를 통해야 생명을 풍성하게 얻고 인격적인 부요함을 누릴 수 있다고 가르쳤다. 중요한 대목은 피교육자 자신이 먼저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는 일이라는 데 착안하여 전도에 필요한 이론적 근거와 방법들을 배우도록 이끌었다는 점이다.
(2) 성령 소책자 교육 요령
본 책자의 제목은 ”성령 충만한 생활의 비결을 발견했습니까?“이다. 성령의 지배를 받으며 사는 성도의 삶은 어떤 환경이나 상황에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말한다. 고린도전서 2장 14절에서 3장 1절에 근거하여 사람을 세 유형, 즉 신령한 사람, 육신에 속한 사람, 육에 속한 사람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성령이 임하시면 능력을 받고 이미 증인이 되었으나 불순종으로 인해 사역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이다. 성령 세례는 구원의 확신을 주는 것이고, 성령의 은사에는 봉사하도록 주시는 은혜로 말씀의 은사, 섬김의 은사, 표적의 은사가 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이고, 성령 충만은 날로 성화(聖化)를 향해 가는 삶으로써 영혼의 호흡을 지속하는 가운데 성령을 근심하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는 내용이다.
2) 대화편: QT교육
평신도 교육의 두 번째 부분은 QT(Quiet Time) 교육으로써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를 통한 인격적인 만남이므로, 첫째 살아있는 존재라야 하고, 둘째 인격적인 존재라야 하며, 셋째 의사소통의 도구로 성경 말씀이 필요하고, 넷째 주도적으로 말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설명이다. 큐티는 기도로 시작하여 성경 본문을 통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며 나에게 주신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파악하여 묵상한 다음 결단의 기도를 거쳐 서로의 삶에 대한 나눔의 시간을 갖도록 편성했다.
3) 정규과정편: 일대일 제자양육 성경공부
세 번째 과정은 두란노서원에서 출간한 「일대일 제자양육 성경공부」라는 책으로 진행했다. 이 책의 표지에 있는 배의 방향을 조종하는 키 그림을 자신의 교육과정에 맞게 수정한 이유는 그리스도가 다스리는 삶에 초점을 맞추기 위한 것이다. 중앙의 원에는 예수님을 배치하고, 두 번째 원에는 구원의 확신을 넣고, 세 번째 원에는 하나님의 속성, 성경, 기도, 교제, 전도, 순종, 시험, 성령 충만한 삶을 넣었고, 사역은 원 밖으로 배치했다. 여러 가지 신앙적인 요소를 구원받은 삶과 직접 연결해 설명할 수 있어야 하고 실제 삶에 적용하도록 가르쳐야 했기 때문이다.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사람은 이신칭의(以信稱義)에 의해 중생한 사람이며, 구원의 확신을 가진 사람의 삶은 윤리 도덕적인 변화를 통해 성화하는 것을 말한다.
결국 성도 개개인의 실질적인 변화를 돕고 그리스도의 지배를 받는 삶으로 인도하는 길이 평신도 지도자 교육의 목적이었다. 그 핵심은 칼빈주의의 5대 교리에 있었다. 첫째 로마서 5:12-21에 근거한 전적 타락(Total depravity), 둘째 로마서 4:4-8에 근거한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셋째 에베소서 1:4 & 마태복음 1:21에 근거한 제한 속죄(Limited atonement), 넷째 요한복음 6:37-40 & 로마서 8:18-39에 근거한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 다섯째 베드로전서 5:10에 근거한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을 철저히 가르침으로 궁극적으로 주님을 위한 사역에 충성하기를 기대한 것이다.
3. 한국 교회사 연구
김대인 목사가 한국의 초기 교회 역사에 대한 관심을 가진 때는 1984년이었다. 그해는 알렌 선교사가 우리나라에 입국해 선교를 시작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여서 황해노회는 김 목사를 중심으로 ‘백주년기념사업회 소래교회 복원위원회’를 발족시켰다. 그런데 그는 한국 교회사를 살펴보는 가운데 소래교회에 관한 기록들이 전혀 일관성이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때부터 자신이 직접 자료를 찾으며 연구에 착수한 이유였다. 그 노력이 결실을 맺어 1995년에 「숨겨진 한국 교회사: 민족교회의 발생」을 출판하게 되었다. 이 책의 내용은 소래교회는 물론 서상륜과 서경조 목사의 행적을 중심으로 복음 전파로 인한 개회의 꿈과 갖가지 선교사들의 애환을 다루었고, 부록으로 소래교회의 복원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1) 소래교회 설립일자: 1883년 5월 16일
김대인 목사는 평소 소래교회야말로 서양 선교사들이 들어오기 전 우리가 세운 민족교회라는 데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실제 「숨겨진 한국 교회사」 출간에 즈음한 「목회와 신학」 지와의 인터뷰에서 한국교회를 바로 세워나가려면 사대주의 사상을 버려야 하며 올바른 역사관과 역사 기술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가 소래교회의 기원에 대해 관심을 기울인 결과 1885년 설을 주장하는 김양선 목사의 견해, 1884년을 주장하는 기독교대백과사전의 견해, 박용규 목사와 민경배 교수 등의 견해를 일일이 짚어보면서 사료적 근거를 바탕으로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가장 큰 문제는 정확한 설립 연대를 담보할 만한 문헌적 기록이 전혀 없다는 점이었다. 이제 남은 증거는 월남하여 살고 있는 옛 소래교회 교인들의 증언뿐이었다.
현재 역사학계에서는 구체적인 기록이 없는 경우에 사건 당사자들의 증언을 통해 역사를 복원하는 작업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김 목사는 가히 교회사 복원작업의 선구자인 셈이다. 가장 신빙성이 있는 것은 소래교회 설립자인 서경조 목사가 시무할 때 같이 신앙생활을 영위한 사람들의 말이었다. 그중에 송천교회를 거쳐 백령도에서 목회하던 허간 목사의 증언을 주목했다. 그에 따르면 1943년 일제 말기에 소래교회 60주년 기념식을 성대하게 거행한 기억이 있다는 것이다. 그 당시 교회 설립일(1883.5.16.)을 포함한 당회 기록까지 갖고 있었으나 불행히도 지금은 분실되어 기록으로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어린 시절 소래교회를 다녔던 이들은 매년 5월을 교회 설립일로 지켰다는 기억을 간직하고 있었다.
시간과 공간을 돌려 1943년 일제강점기에서 6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면 최초의 소래교회의 모습을 상기한다면 도움이 될 것이다. 처음 소래교회는 서경조 목사의 사랑채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교회 위치는 마을에서 약간 떨어져 있었고, 차츰 교인들의 숫자가 불어나자 1894년에 예배당을 신축하기 시작했는데 교회부지를 무당들이 사용하던 당골로 정했을뿐더러 외부의 보조금을 받지 않고 자력으로 완공하는 저력을 보였다. 이듬해 여덟 칸짜리 교회당을 건축한 뒤에도 교세는 날로 번창하여 1896년에는 다시 16칸으로 증축했다. ‘기독교선교100주년’을 맞이한 1896년 그와 똑같은 16칸짜리 소래교회의 예배당을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양지캠퍼스에 복원한 일은 그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2) 설립자: 서상륜과 서경조 형제
서상륜은 만주에서 존 로스(John Ross, 1841~1915)와 존 매킨타이어(John Macintyre, 1837~1905)를 만나 한글을 가르치면서 성경 번역에 힘쓴 결과 1883년 번역을 완료한 성경을 국내로 들여오다가 국경 검문소에서 발각되어 투옥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집 하인이던 김유순의 도움을 받아 극적으로 탈출한 뒤 소래로 이주해 동생 서경조와 함께 동네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했다. 그에 족하지 않고 전도의 영역을 서울로 넓힌 서상륜은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1859-1916) 선교사가 입국하자 1885년부터 그와 사역을 같이했다.
그런데 연구 중 김 목사가 밝힌 중요한 사실이 있었다. 최초의 수세자(受洗者)는 그동안 알려진 것과는 달리 노춘경이 아니라는 근거였다. 1886년 7월 노춘경이 세례를 받기 전 이미 1885년 7월 서경조가 서울에서 언더우드에게 세례를 받은 데 이어 그해 9월에도 소래에 내려온 언더우드가 서경조의 아들에게 유아세례를 베푼 사실을 밝혀낸 터였다. 또 하나 노춘경이 세례를 받은 계기는 언더우드의 전도나 한문 성경을 읽고 난 뒤가 아니라 서상륜이 만주에서 로스가 번역한 성경을 전달해준 것이 주요인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새문안교회 첫 예배에 참석한 14명은 서상륜의 전도로 얻은 열매일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4. 교회 유적지 탐방
1) 소아시아 일곱 교회 탐방
교회 역사에 깊은 관심을 가진 김대인 목사는 한국 교회사의 현장뿐만 아니라 세계 교회사와 관련한 지역들을 두루 탐방하는 일에도 열심이었다. 그는 1994년 소아시아 일곱 교회를 다녀온 뒤 작성한 순례기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긴다. ”절대주권의 하나님께서 어찌 당신을 섬기는 교회를 지진에서 구하지 못하시고 폐허가 되게 하셨을까?“ 물론 이는 성경을 이해하는 데 긍정적인 도움을 주려는 의도였겠지만 필자의 생각은 좀 다르다. 즉, 한때는 하나님을 섬겼지만 끝내 믿음을 버리고 바알과 같은 우상을 받드는 그들의 불신앙을 심판하신 것이다. 따라서 그의 성지순례기에서는 의문이 생기는 부정적인 측면을 강조했다기보다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의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고, AD 50년경 바울 사도가 복음을 전하던 3년간의 행적(사도행전 20:31)을 탐사하는 데 초점을 맞추는 것이 옳다고 본다.
교회 유적지 탐방기에서 김 목사가 돌아본 소감은 남달랐다. 이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의 흔적을 뒤로하고 사도 요한이 머문 밧모섬의 옛 흔적을 더듬은 데서도 나타난다. 셀주크(Selcuk)에 있는 사도요한기념교회, 에베소에 있는 잠자는 일곱 사람의 카타콤, 히에라볼리에 있는 사도 빌립의 순교지 교회 등을 돌아보며 단지 성지를 관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성찰의 시간이었다고 고백한 참이다. 다만 필자의 경우 처음 교회를 세우고 주님을 섬기기 위해 헌신한 초대교인의 발자취를 통해 자신의 신앙을 반추하는 일은 의미가 있다고 보지만 ‘성지(聖地)’라는 용어나 ‘순례(巡禮)’라는 낱말을 쓰는 것에는 선뜻 동의하지 않는다. 오늘날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이미 이방 종교가 판을 치고 있을뿐더러 이른바 성소라는 곳들이 형편없이 훼파된 마당에 성경 속에 등장하는 처소들을 찾아다니며 참배하는 일이야말로 비성경적이라고 분별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성지란 거듭난 성도들이 어디든 딛고 서서 영과 진리로 예배하며(요한복음 4:23~24) 기도하는 곳(이사야 56:7, 마가복음 11:17)을 말한다.
2) 만주 동북 삼성 탐방
김대인 목사는 1995년 동북 삼성의 한국 교회사 유적지를 탐방한 다음 「그때 그 현장: 복음과 민족운동의 만남」이란 책자를 출간한다. 중국 대륙의 만주 땅을 찾아간 목적은 동북 삼성이 ”한국의 독립을 갈망하는 민족주의들들과 이를 말살하여 한국 침탈의 야욕을 채우려는 일본 제국주의자가 대결한 현장을 찾아가는“ 데 있었다. 그는 역사의 뒤안길을 둘러보는 동안 기념 표지석에 새긴 남북분단의 비극을 절감하며 이데올로기의 프리즘을 통해 사실(史實)마저 다르게 해석되는 현실에 뼈아픔을 느꼈다. 1900년대 이후 세워진 훈춘교회와 독립운동의 발자취 가운데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의 궤적을 확인한 것은 그의 종제 안명근의 업적과 아울러 조부 김용제와 관련된 105인 사건을 짚어본 뒤 731부대의 터를 찾아가 중국 신자들과의 교제를 소개한 것과 연결된 맥락이었다.
그는 간도 이민 역사에도 큰 관심을 보였다. 장춘을 여행하며 만보산 사건과 그로 인한 일본과 한중간의 갈등을 해결한 손정도와 한국교회 지도들의 활동을 소개한다. 국경도시 도문을 거쳐 훈춘에 가서는 1910년대에 세워진 교회를 찾아보고 청산리대첩을 설명하지만 김좌진 장군보다는 홍범도 장군에 초점이 맞춰져 안타깝다는 심경을 전한다. 백두산 지역을 지나 봉오동전투 장소와 청산리대첩의 유적지들을 보고서는 그곳의 지형을 분석하며 독립운동 현장의 숨결을 생생하게 전했다.
용정 지역에서는 용정교회의 흔적과 독립운동의 중심지였던 서전서숙을 비롯해 1919.3.13. 만세운동을 주도했다가 희생당한 이들을 추모한 항일의사능과 명동촌에서 민족운동의 자취를 소개한다. 독립운동가 김약연은 명동서숙을 세워 민족운동을 전개했는데 교장이 감화를 받아 기독교로 개종하는 일이 일어났을 뿐만 아니라 1910년 명동학교로 발전을 거듭해 민족정신에 투철한 교육으로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하였다. 1909년 정재면이 설립한 명동교회는 캐나다까지 영향력을 넓혀 3•1독립만세운동을 전후해 90명이 피살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윤동주의 생가에서는 그의 일생을 돌아보는데 만주에서 태어나 명동학교를 졸업하고 용정의 은진중학교를 거쳐 연희전문학교에 들어간 뒤 일본 동지사대학에 유학한 문학도였으나 불령선인(不逞鮮人)이라는 딱지로 복역하다가 1945년 2월 해방을 앞두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마지막 연길로 이동한 김 목사는 의란 항일 유적지와 삼둔자 전적지 견학을 끝으로 귀국하면서 책자 말미에 로스 목사로부터 시작된 우리나라 선교의 역사를 반추하며, 만주 지역 교회의 회복을 위한 한국교회의 사명과 남북통일에 대한 염원을 담고 있다.
3) 종교개혁 유적지 탐방
김대인 목사는 지경을 넓혀 2001년 종교개혁의 유적지들을 돌아보고 「젊은 오빠 서유럽을 가다」라는 책을 펴냈다. 그 책의 서문에서 모든 여행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맨 먼저 찾은 곳은 루터가 종교개혁을 도모한 발상지였다. 루터의 회심 장소인 슈토턴하임, 출생 후 성장한 아이스레벤, 아이제나흐, 에르푸르트는 물론 종교개혁을 구상하고 진행한 비텐베르크, 라이프치히, 마르부르크, 보름스, 바이마르, 하이델베르크 외에도 경건주의와 관련한 할레, 함부르크, 베를린, 포츠담 등을 찾아 그 지역의 명소를 소개하면서 역사적 의미와 문화유적이 어떻게 높은 수준의 국가적 자원으로 활용되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스위스에서도 역시 종교개혁과 연관되어 있는 바젤, 취리히, 빌트하우스, 칼빈의 제네바를 소개하고 있다. 프랑스에 가서는 칼빈의 출생지인 노아용과 교육을 받은 파리, 피난민 목회를 했던 스트라스부르를 소개한다. 영국에 와서는 청교도 운동의 중심지였던 플리마우스, 브리스톨, 바스, 글로스터, 옥스퍼드, 런던, 케임브리지, 일리, 맨체스터 등을 두루 돌아보았다. 스코틀랜드에서는 에든버러를 둘러보고 개혁자인 존 녹스와 북부의 닉을 소개한 다음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을 끝으로 유럽 여행의 대장정을 마무리한다.
김 목사의 여행기를 읽으면서 느낀 바는 여행을 떠나기 전 미리 탐방지에 대한 조사에 철저하다는 점이었다. 원저자 이은선 교수에 따르면 김 목사가 파리에서 본인에게 국제전화를 걸어 칼빈의 정확한 정보를 알려달라고 부탁할 정도였다고 한다. 어느 지역이든 역사적 의미를 확인하고 미래를 조망해 보는 태도에서 우리가 나아가야 할 신앙의 방향을 정립하는 전기를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 본인의 확고한 목회 철학이었다.
5. 설교의 세계
김대인 목사는 자신의 설교집을 출판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홈페이지에 적지 않은 강해 설교를 남겼다. 그는 본문 말씀을 읽고 약간의 설명을 더하던 기존의 방식을 버리고 성경을 연속적으로 강론하고 해석하는 방법을 택하였다. 이는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파한 뒤부터 주종을 이루던 예화 설교나 제목 설교와는 달리 영국의 로이드 존스(David Martyn Lloyd-Jones, 1899-1981) 목사를 본받아 교리 강좌에 가까운 형식을 취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홈페이지에 실은 설교 원고는 주로 기독론과 성령론으로 레위기, 민수기, 여호수아, 아가서, 다니엘서, 마가복음, 사도행전, 에베소서 등의 강해 설교와 함께 남아있다.
일부 성령론 설교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을 보면, ”올바른 성령론을 알고 있는 성도는 매우 희귀합니다. 바른 성령론을 주일 낮 설교에 접목시킨 결과 많은 성도들이 성령님의 참 은혜를 깨닫고 구원의 확신과 바른 성도의 삶을 찾아가는 것을 보았습니다“라고 밝히면서 다음 세 부분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1부의 중생론은 요한복음 3장을 가지고 거듭남에 대한 개념을 다룬 뒤 요한복음 14장과 16장을 가지고 그리스도께서 보내시는 성령의 사역을 해설했고, 우리 몸이 성령의 전이라는 것과 성령 충만을 받아 그분의 인도하심으로 성령의 은사를 올바르게 사용할 것을 가르쳤다. 2부에서는 각종 은사를 다루었고, 3부에서는 구원론을 성령론으로 설명하는 지점에서 개혁주의의 명확한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 중생론
– 거듭나지 아니하면 = 요한복음 3:1~15
– 또 다른 보혜사 = 요한복음 14:16~21
– 내 것을 가지고 = 요한복음 16:7~15
– 세상을 이기었노라 = 요한복음 16:25~33
– 성령의 전 우리의 몸 = 고린도전서 6:12~20
– 성령이 충만하여 = 사도행전 4:23~31
– 성령과 은사 = 사도행전 2:1~4
* 은사론
– 신유의 은사 = 마가복음 16:14~18
– 섬김의 은사 = 로마서 12:3~10
– 말씀의 은사 = 고린도전서 12:27~31
– 성령의 은사와 열매 = 고린도전서 12:27~13:3
– 은사를 받으셨습니까? = 고린도전서 12:1~11
* 구원의 서정
– 성령은 하나님이다 = 사도행전 5:1~11
– 성령의 부름과 중생 = 에스겔 36:22~31
– 성령의 회심과 신앙 = 사도행전 9:1~9
– 성령의 칭의와 수양 = 로마서 8:8:12~17
– 성령의 성화와 견인 = 이사야 30:18~22
위와 같은 측면을 종합해 볼 때 김대인 목사의 설교는 예화나 제목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강해를 중심으로 교리에 치중한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따라서 그의 설교는 칼빈주의 신학에 기초하여 성경 말씀을 정확히 강해함으로써 성숙한 성도들을 양육하는 데 중점을 둔 교육 목회의 단면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필자가 특별히 주목한 지점이 있다. 김 목사는 막상 자신의 설교집 출간에는 극히 인색했다는 점이다. 오랜 기간 강단을 지키며 강해 설교에 치중한 점을 감안하면 매우 이례적으로 보이는 대목이다. 왜 그랬을까. 필자는 목회자 김대인이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겸양의 덕을 실천한 사례로 판단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고 적용할 때는 누구보다 치열하게 연구하고 열심을 냈으나 연약한 인간의 말을 활자화하여 보존하는 일을 부담스럽게 느낀 게 아닌가 한다. 다만 인터넷이 보급되자마자 거의 독학으로 스스로 홈페이지를 구축하여 자신의 교회사 연구 성과와 목회경험들을 공유한 점은 돋보인다. 일개인의 얼굴은 애써 감추면서도 공동체를 위한 일에는 발 벗고 나선 그의 행보를 높이 평가하는 이유다.
6. 나가는 말
한국교회는 구한말 어두운 국내외적 상황을 딛고 1907년 평양대부흥을 경험하면서 질적인 면과 양적인 면에서 놀라운 성장을 가져왔다. 그때의 성숙을 기반으로 초기 선교사들과 합력하여 일제의 혹독한 시련을 견딜 수 있었다. 여러 곳의 기독교학교들이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문을 닫는 가운데 갑자기 해방을 맞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한국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을 수밖에 없었고, 독재정치와 군사정권에 의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노동 집약형 산업화를 도모하는 과정에서 다각적인 민족복음화운동을 전개하여 이룩한 교계의 발전상은 실로 괄목할 만한 성과였다. 성삼위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와 정통 신학(Othodoxy Theology)에 근거한 목회자들이 헌신적으로 교회 강단을 지켰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에 본고는 평생 일선에서 교육 목회를 실천하며 우리나라 초기 민족교회를 깊이 연구했던 김대인 목사의 삶과 사역을 살펴보았다. 그는 성경에 기초한 강해 설교를 통해 교인들의 신앙교육에 초점을 맞추었다. 양적인 성장보다는 질적인 변화에 중점을 두었고, 숫자적 부흥보다는 성도들의 인격 변화에 집중하였다. 칼빈의 예정론에 입각한 그의 교리 설교는 평신도를 지도자로 바로 세우는 데 매진한 공로가 크다. 나아가 한국 교회사 연구를 통해 미래의 좌표를 설정하는 한편 국내외 교회 유적지 탐방을 통하여 신앙 유산의 과거를 되돌아보는 일에도 모본을 보였다. 앞으로 한국교회 안에서 김대인 목사의 생애를 재조명함으로써 교육 목회의 중요성과 선교의 새로운 이정표가 세워지기를 기대한다.
*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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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란노 편집부, 「일대일 제자양육 성경공부」, 서울: 두란노서원, 2015
-. 류숙희, 「백범 김구를 성장시킨 인적 환경」, 서울: 한국학술정보, 2009
-. 배현주, ‘디모데교회섬김연구소’ https://cafe.daum.net/dimode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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