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 역사에는 존재하지 않는 왕비에스더
먼저 구약의 에스더기의 대략적인 내용을 살펴보자.
구약의 에스더기는 에스델이라는 여성에 의해서 유대 민족이 큰 위기를 모면한 이야기이다. 페르시아의 왕크세르크세스 1세 재위시에, 총신(寵臣) 하만이 페르시아에 있는 유대인들을 몰살하려고 기도하였다. 그런데 유대인인 에스델이 왕비가 되어 양부(養父)이자 사촌오빠인 모르드개와 협력하여 하만의 음모로부터 유대인들을 구출해냈다. 그 결과 하만은 모드르개 대신 처형되고 도리어 음모에 가담했던 자들은 유대인의 손에 죽었다. 유대인들은 이 날의 승리를 기념하여 매년 푸림절(節)을 지키는데, 이 책을 쓴 목적은 푸림절의 기원을 기록하여, 야훼가 유대 민족을 지키고 인도한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데 있다.
이 얘기는 페르시아의 수도인 수사를 배경으로 벌어지는 잔혹 학살극이다.고어물 BC 538년 경 키루스 대왕이 신 바빌로니아를 멸망시키면서 반 세기 전 바빌로니아에 노예로 끌려갔던 유대인들은 몇 차례에 걸쳐 고향으로 귀환하게 되는데, 주인공 모르드개와 에스더는 부녀만큼 나이 차가 나는 사촌지간으로 고향에 돌아가지 않고 페르시아에 남은 유대인이다. 즉 재일교포 같은 신분이라고 보면 된다.
황제 크세르크세스[17]는 술김에 얼굴을 내놓고 혹은 옷 다 벗고 나타나라는 부당한 명령을 거역한 왕비 와스디를 홧김에 폐위시킨다. 대신 후궁 몇을 들이는데 운 좋게 그 눈에 들어 왕궁에 들어가게 된 에스더는 왕비 자리에까지 오른다. 페르시아의 대신 하만은 모르드개가 자신에게 절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유대인들을 몰살시키려는 계획을 세우는데, 당시 황제 크세르크세스의 후궁이 된 에스더의 용기로 오히려 자신이 식솔들과 함께 나무에 매달리는 신세가 되버린다.
더 나아가 에스더의 사촌 모르드개는 완전 출세해서 크세르크세스 황제의 허락을 얻어 유대인들이 페르시아 국민 7만 명을 학살하게 한다.
이것이 에스더 서의 대략적인 내용이다.
그러면 이 얘기가 있었음 직한 연대는? 선선대 왕인 키루스 대왕(기독경전에서는 고레스)이 신 바빌로니아를 멸망시키고 유대인 귀환이 이뤄진 시기는 BC 538년이다. 또한 에스더 서의 사건이 일어난 시기를 성경은 크세르크세스 즉위 3년째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으니 크세르크세스의 재위 기간 (BC 486년~465년)으로 살펴보면 BC 483년의 일로 유대인 귀환이 시작된 지 50년쯤 지난 시기인 것이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이 부분에서 상당히 괴이한 연대가 튀어나온다.
전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서 유다 왕 여고냐와 백성을 사로잡아 갈 때에 모르드개도 함께 사로잡혔더라(에스더 2:6)
성경은 모르드개가 남유다가 신 바빌로니아에 멸망당할 때 잡혀간 인물이라고 적고 있다. 그런데 이 때는 BC 580년 경이니 483년까지 몇살인지 계산해보자. 갓난 아기 때 잡혀갔다고 가정하고 보아도 BC 530년 경 귀환 때면 아무리 적게 잡아도 50대가 되어있다. 그리고 50년 후(…) 에스더가 왕후가 된다. 모르드개는 100살 전후의 영감이 되어있는 시기다.솔직히 아무리 부녀지간만큼 나이 차이가 난다고 봐 줘도 에스더는 꽃다운 열 몇살이 아닌(…) 아무리 젊게 봐준대도(…) 50,60살 이하의 생처녀가 될 수가 없단 말이 된다.실은 할머니 모에
사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살펴보면 나올 문제들에 비하면 이건 문제도 아니다. 성경 에스더기의 기술이 역사적으로도 교차 검증 되는 사실인지 파고들기 위해 당시 페르시아 상황과 에스더 서가 기술한 페르시아 상황을 비교해보자.
엄연한 실존 인물인 크세르크세스(Xerxes)는 페르시아 4대 황제로, 틀려보이는 것은 이름 정도인데 같은 인물이 맞다. 당시 제국 공용어인 아람어로는 아하수에로, 그리스 어로는 크세르크세스로 한국어로는 관대하 표기된다.
에스더서 1장을 보면 크세르크세스는 즉위 3년 째에 페르시아와 메디아를 비롯해 전국에 깔려있는 온갖 부하들을 다 불러모아 6개월 동안 엄청난 연회를 벌였다고 되어있다. 근데 실제 역사에서 살펴보면 이 때 크세르크세스는 그리스 전쟁 때문에 한창 바쁠 때였는데 아무리 위로 잔치를 크게 벌여도 6주도 아니고 무슨 \’6개월\’씩이나 퍼 마시고 놀고 있었겠는가? 이 시기 크세르크세스는 이집트의 반란과 바빌로니아의 반란까지 진압한 후에 그리스 침공을 준비하던 시기였다.
하만은 아각 사람 함므다다의 아들이라고 쓰여있다. 그런데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지만 아각이라는 이름은 사울 왕과 피터지게 싸웠던 아말렉 왕 아각의 이름과 같은데(삼상 15:6-9) 재밌는 점은 모르드개가 그 사울 왕의 베냐민 지파 후손이라는 것이다. 아각과 사울 가의 치고받는 숙명이 이국 땅에서 재현되는 양상이라 하겠다. 그러나 문제는 아각이라는 이름의 종족은 역사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헤로도토스의 역사서 등등 당시 페르시아 상황을 보면 에스더 서의 기록과 어느 정도는 부합하는 면이 있긴 있다.팬픽을 써도 그 정도 고증을 하는 경우는 있다. 120개의 도, 왕명은 한 번 반포되면 고칠 수 없고 왕의 어명이 파발로 전국에 나가는 것, 왕의 부름 없이는 누구도 왕 앞에 갈 수 없는 것이나 이방인이 높은 관직에 앉을 수 있는 것 등은 모두 사실이다.
그런데 정작 주인공인 에스더는 실제 역사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당시 유대인 고위 관료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고 모르드개와 이름도 비슷한데 그가 모르드개라는 증거는 없다. 실제 역사에는 그 유대인 고위 관료가 성경 속의 모르드개와 같은 행보를 보인 기록이 전무하기 때문이다.
에스더 역시 마찬가지로 에스더의 원래 이름은 하닷사라고 하는데 실제 역사에 남은 크세르크세스의 왕비 이름은 와스디도,에스더도 아닌 후타오싸(그리스 어로 아메스트리스)라고 한다. 하닷사와 비슷하게 들리기는 하지만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이름으로 페르시아 장군의 딸이라는 헤로도토스의 기록이 남아있는 이 왕비는 크세르크세스에 의해 폐위된 적도 전혀 없으며 그녀의 행적 중 에스더와 비슷한 면은 전혀 찾을 수 없다.
애초에 왕비가 교체된 사건 자체가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나오질 않는다.
즉 에스더와 모르드개, 하만은 대제국 페르시아의 왕후와 재상에다 7만 명이라는 대학살극을 벌였는데도 전혀 역사에서 찾아볼 수 없고 크세르크세스를 제외하면 모두 다른 인물들이 그 자리를 차고 앉아 있다. 즉 이 세 사람은 성경에서밖에 찾아볼 수 없는. 역사적으로 완전 실증할 수 없는 인물이라는 말이다.
성경에 따르면 에스더가 하만의 음모를 좌절시키고 나자 이번에는 유대인들의 페르시아 본토인 대학살이 펼쳐진다. 하만과 아들 열 명을 비롯해 수산에서만 800명부터 시작해 살해당한 숫자가 무려 75000명이다. 아무리 하만이 거짓말을 했다지만 황제는 자기가 페르시아 황제가 아니라 유대인 왕이나 되는 것처럼 유대인들에게 자기 백성들을 학살해도 좋다고 용인하는 것이다. 그것도 마누라 꼬임에 넘어가서 말이다!
당시 7만 명의 인구는 대단한 규모이다. 그런 숫자를 그것도 외국 여자 꼬임에 넘어가서 남의 이민족이 자기 백성들을 그만큼 학살하는데도 방관하는 황제가 어디 있는가? 아무리 황제가 절대적 권력을 휘두르던 시대라도 통치 근본은 같으며 이만한 몰살은 나라의 근본이 흔들릴 수 있는 일이다. 쉽게 비유하자면, 재일 교포 여자가 천황하고 결혼해 왕비가 되고 일제 시대 복수로 천황을 꼬셔서 일본인 70000명을 넘게 죽인 셈이 되는 것이다. 그것도 이만큼 학살하는데 걸린 기간은? 겨우 \’열흘\'(…)이다!
이런 대단한 학살극이 있었다면 필히 역사에 기록이나 구전이 되었을 것이고 황제 크세르크세스는 외국 여자의 꼬임에 넘어가 본토인들을 대량학살한 희대의 폭군으로 남는 것이 당연한데 그런 기록이나 이 사건을 페르시아나 근동의 역사에서 찾아볼 수 없다. 거기다 당시는 역사의 아버지로 불리는 유명 역사가 헤로도토스가 태어났을 때인 것이다. 헤로도투스는 훗날 페르시아와 그리스 간의 전쟁을 상세히 기록했고 크세르크세스에 대해서도 상당히 객관적인 기록을 남겼지만 에스더 사건에 대해서는 그 비슷한 얘기도 없다.
다른 그리스 역사서도 마찬가지로 하만이나 모르드개가 페르시아 전쟁 시절 총리 쯤 되었다면 그 이름 쯤은 들었을 것이고 측근으로 기록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교차 검증\’이란 것이다. 헤로도토스는 크세르크세스의 오만함이 패인이었다고 적을 정도로 페르시아 역사를 객관적으로 기록했는데 어째서 에스더에 의한 페르시아 민족 7만 살해는 전혀 언급이 없나? 이 사람들 주장대로라면 진시황이나 네로같은 폭군들도 아예 자기 악행을 기록 못 하게 막아서 후대에 전해지지 않아야 정상 아닌가?
상기할 점은 당시 페르시아가 인종과 종교에 있어 관용을 지키는 사회였다는 것이다. 페르시아의 공식 종교는 조로아스터 교였지만 그것을 강요하며 탄압이나 학살을 하지는 않았는데 덕분에 당시로서는 장수한 나라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정복민들에 대한 페르시아의 정치·종교적 관용은 널리 알려진 사실인데 하만이 종교와 풍습을 이유로 유대인들을 학살하자고 나서는 것은 당시 페르시아 풍토에서도 전혀 맞지 않는 일이다.
이제 에스더서가 기록된 시기를 살펴보자. 마카베오 하 15장을 보면 유대인들이 \’부림절\’을 지키기 시작한 시기가 대략 BC 2세기임을 알 수 있다. 부림(푸림)절의 부림은 \’제비\’를 의미하는 \’푸르\’의 복수형으로 제비를 뽑아 유대인을 죽이려고 한 그 날 도리어 이방인들을 학살했다는 에스더 서의 사건을 기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건들은 에즈라, 느헤미야, 집회서(기원전 190년경)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거기다 당시 유대민족과 이민족 간 혈투, 특히 그리스 셀레우코스 왕조와의 험악한 관계나 마카베오 가문이 이끄는 저항군이 주변 이민족과 극렬 대립하던 상황을 보면 에스더 서의 진위에 의심이 갈 수 밖에 없다. 에스더 서의 사건이나 하만의 모함은 오히려 유대인의 전통과 풍습을 강경하게 탄압한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왕 때나 더 적합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 사건에서 수백 년 지나 쓰인 마카베오 서에는 모르드개가 모르드개일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등장한다. 그런데 마카베오 서보다 먼저 쓰였으며 역대 선지자와 예언자들의 명단을 모아놓고 찬양하는 \’집회서\’에도 유일하게 나오지 않는 이름이 바로 모르드개와 다니엘인데 이것은 에스더 서나 다니엘 서가 그때까지 쓰여지지 않았고 적어도 다니엘도 예언자로 취급되지 않았음을 뜻한다.
이 에스더 서의 배경을 200년 뒤로 돌려 마카베오 항쟁 시대로 바꾸면, 그리고 하만의 박해를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의 박해로 바꾼다면 에스더 서의 내용은 당시 마카베오 시대 상황과 딱 맞아 떨어진다. 이 부림절 자체가 페르시아의 신년 명절, 혹은 바빌로니아의 신년 축제나 마르두크 신의 축제일을 유대 명절로 바꾸고 그 근거를 대기 위해 에스더서가 쓰여졌을 가능성이 크다.
문헌 비평가들은 연대 구분을 완전 무시하고 있긴 하지만 제2경전을 덧보태어 에스델서의 종교적 의미를 두드러지게 한 이는 세련된 그리스계 유대인일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이러한 정황상 문헌 비평가들은 에스델서는 2세기 말엽 곧 크세르크세스 1세 시대 이후 3세기가 지난 다음 아마도 메소포타미아의 디아스포라에서 저술된 것으로 9,20-32에는 여타의 부분들과는 다른 문체 및 상반되는 내용이 나타나는데서 이는 이 구절이 후대의 첨가물이라 추정하고 있다.
다음 성경의 구절을 보자.
마케도니아 사람….하만…페르시아의 피가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이방인일 뿐 아니라…(에스더 16:12)
황제는 하만을 마케도니아인이라고 비난하는데 이는 명백한 시대 착오다. 하만이 마케도니아인이며, 페르시아 왕국을 마케도니아인들에게 넘겨주려는 음모를 꾸몄다고 발표하는데 이런 상황은 이 때로부터 1세기 반 후 알렉산드로스가 페르시아를 정복할 때에야 찾아오는 것이다. 이 때 마케도니아는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는, 전혀 위태로울 것 없는 한 속국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하만의 음모가 사실이었다면 마케도니아는 페르시아의 평화로운 속국으로 남아있지 못할 것이 당연한 일인데도 말이다.
현재 중동의 이라크 지역에는 에스더와 모드르개의 무덤이 같이 나란히 있긴 한데, 주류 역사학자들은 후대의 날조의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상식적으로 어떻게 왕비인 에스더가 아무리 사촌이라고 해도 모르드개 하고 같이 묻혀 있겠는가(…)
아이작 아시모프는 에스더 서에 대해 재미있는 해석을 내놓고 있는데 에스더의 저자가 독자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 바빌로니아 신화를 끌어들였다는 것이다. 하만은 페르시아 건국 이전 앗시리아에 멸망당한 엘람의 남성 주신의 이름인 함만에서 왔고 와스디는 엘람의 여성 주신의 이름이다. 거기다 하만의 아내 이름은 제레스(zelesh)인데 이 이름은 엘람 신화의 함만의 아내 키리샤(Kirisha)에서 온 것으로 보고 있다.
모르드개는 히브리 이름이 아니다. 불명확하지만 그 이름은 히브리 형태로 므로닥(Merodach)이 되는 바빌로니아의 주신 마르두크이며 에스더는 바빌로니아의 여신 이슈타르의 변형이라는 것이다. 이슈타르의 아람어 형태는 에스델이며 에스더의 본명 하닷사는 \’신부\’를 뜻하는 이슈타르의 신격을 나타내는 바빌로니아 낱말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재미있게도 마르두크와 이슈타르는 모르드개와 에스델처럼 사촌 간이다.
엘람이 쓰러지고 바빌로니아가 엘람을 대체한 셈이 되었으니[18]당시 단일신교적 사고방식으로 바빌로니아 신들이 엘람 신들 대신 들어섰으며 바빌로니아의 주신 마르두크가 엘람의 주신 함만을, 바빌로니아 여성 주신 이슈타르는 엘람 여성 주신 와스디를 대체했다는 것이다. 이런 가설은 에스더가 와스디 대신 왕비가 되고 모르드개가 하난 대신 총리가 된 에스더 서의 코드와 상당 부분 맞아들고 있다.
결국 유대인 여자 에스더가 \’인생은 한 방!\’이라는 표어를 증명이라도 하 듯 시집 잘 가서 자신은 물론이고 유대인 전체의 인생 역전을 주도했다는 성경 에스더 서는 여러 정황들로 볼 때 완전히 허구의 내용이고 에스더도 가상 인물로, 페르시아에 구박이야 좀 받았겠지만 학살당할 이유도 없었던 시대를 배경으로 쓴 내용이다.
물론 내용상 페르시아의 당시 상황과 부합하는 면이 있으나 이것은 이 소설을 쓴 저자가 당시 페르시아 상황에 해박하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며 에스더서 자체가 허구의 문학 작품이라는 것은 이미 학문적으로나 유대교, 신, 구교 측의 모든 신학자들의 정설이 되어 있다.
적어도 마카베오 시대가 되기 전까지, 유대인들은 역사적으로 주변 강대국에 수없이 짓밟혀왔으면서도 자신들에 대한 말살 정책에 한번도 당당하게 조직적으로 반격해 본 역사가 없었다. 에스더와 다니엘은 당시 셀레우코스 왕조에 억압당하던 시기 그 당시의 억압상을 우회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바빌론 유수기를 배경으로 가상의 인물을 창조한 다음 유대인들의 이뤄질 수 없는 이상과 소망을 소설 형태로 그려낸 문학작품들로 평가되는데 에스더 서 역시 묵시 문학과는 좀 다른 방향에서 셀레우코스 왕조 하의 가혹한 탄압을 받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집필됐다는 점에서 가치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출처 : https://m.cafe.daum.net/woorinart/GHzN/239?listURI=%2Fwoorinart%2FGHz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