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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도문 강해 _ 김세윤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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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도문 강해

–  김세윤 박사의 [주기도문 강해]를 중심으로  –

                                                              황원하 강도사

1. 들어가면서

‘주기도문’(The Lord’s Prayer)은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이다. 지금까지 이 기도문은 흔히 기도의 모범, 혹은 기도의 방법 정도로만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김세윤 박사는 그의 저서 [주기도문 강해]를 통하여 주기도문이 그것을 훨씬 초월하는 메시지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의 성경 신학적인 관점에서의 주기도문 관찰은 매우 탁월하다.

그는 주기도문이 주님의 공동체의 이상이며, 제자도를 가능케 하는 원동력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주기도문을 첫 번째로 주석한 사람으로 알려진 주후 3세기의 라틴 교부 터틀리안이 했던 말과 일맥상통한다. 터툴리안은 주기도문을 가리켜 ‘전 복음의 요약'(a breviarium totius evangelii)이라고 했다. 즉, 주기도문은 단순한 기도문이 아니라 주님의 전 인격과 사역이 투영되어 있는 복음 중의 복음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주기도문을 자세히 연구함으로 주님의 삶을 이해할 수 있고 그의 사역의 본질(하나님의 나라)을 파악할 수 있다.

본인은 김세윤 박사의 [주기도문 강해]를 요약 정리하는 동시에 몇 가지 서적들을 참고하여 이 글을 전개하려고 한다. 이 글을 통하여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탁월함이 드러나기를 원한다. 그러나 교회에서 평신도를 가르치기 위해 만든 교재이므로 각주를 달지 않고 참고서적만 소개하겠다.

* 본인이 참고한 서적은 다음과 같다.

   김세운, ‘주기도문 강해’, 두란노

   최갑종, ‘1세기 문맥에서 본 주기도문 연구’, 성광문화사

   ‘그말씀’ 1997년 3월호, 두란노

   헬라어 신약성경(UBS 3판)

2. 주기도문의 명칭

‘주기도’라는 명칭은 신약성경 안에 나타나지 않는다. 주기도문을 수록하고 있는 복음서를 제외하고 주기도문을 수록하고 있는 가장 오래된 책인 ‘디다케’(Didache)에도 특별한 명칭없이 나타나고 있다. 초대교회 시대부터 지금까지 가장 널리 사용되고 있는 주기도문의 명칭은 라틴어로 된 ‘우리의 아버지’(Paster Noster)이다. 우리말 ‘주기도문’은 영어명칭(The Lord’s Prayer)에서 온 것 같다. 영어 명칭은 주님의 기도 혹은 주님이 사용하신 기도라는 뜻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톰슨이 말한 대로 ‘주님으로부터 기원한‘ 혹은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라는 뜻을 갖고 있다(J.G. Thomson, The Praying Christ, p. 79).

3. 두 개의 주기도문 본문이 있는 이유 : 마태복음 6:9-13, 누가복음 11:2-4

복음서에는 두 개의 주기도문 본문이 존재한다. 이 중 어느 것이 원본이며 이 둘의 관계는 어떤지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다. 좀더 광범위하게 말하면, 두 본문의 존재이유는 소위 ‘공관복음서의 문제’와 관계 있다.

여기서 참고로 마태, 마가, 누가 복음을 제일 먼저 ‘공관복음서’(Synoptics)라고 불렀던 사람은 18세기 독일의 신약학자 그리이스바하(J.J. Griesbach)이다. 그리이스바하는 세 복음서가 비슷한 시각에서 기록되어 있으므로 공관복음서라고 불렀다.

‘공관복음서의 문제’에 근거하여 두 기도문이 존재하는 이유에 대한 몇 가지 대표적인 학설들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이중 여섯 번째의 견해를 취한다.

① 예수님의 어록인 ‘Q자료’에서 온 것이라는 견해.

② ‘M자료’(마태의 특수자료)와 ‘L자료’(누가의 특수자료)에서 각각 전승받아 기록했을 것이라는 견해.

③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 중 하나는 Q에서 자료를 받았고, 나머지 하나는 자신의 특수 자료(M이나 L)에서 전승받았을 것이라는 견해.

④ 누가가 마태에 의지해서 썼을 것이라는 견해.

⑤ 예수님이 주기도문을 두 번 말씀하셨을 것이라는 견해.

⑥ 누가복음의 기록이 원본이며, 마태는 저자 나름대로의 의도 하에 변형시켰을 것이라는 견해.

4. 주기도문의 목적

주기도문의 목적을 알기 위해서는 두 복음서의 주기도문의 문학적 맥락을 함께 살펴야 한다.

1) 누가복음판 주기도문의 문학적 맥락에서(눅 11:1-2)

어느날 예수님의 제자 중 한 명이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하므로 주기도문이 가르쳐졌다(눅 11:1). 그런데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누구나 기도에 대해 잘 알고 있었으며(시편), 그 당시에 이미 유명한 기도문들이 있었다.

당시의 대표적인 기도문은 ‘카디쉬’(Kaddish)와 ‘18번 축복기도’(Shemone Esre), ‘쉐마’(Shema) 등이다. 이중 카디쉬는 설교 끝에 함께 낭송한 짤막한 형태의 기도이며, 18번 축복기도는 유대인들이 하루 두 세 번씩 하는 가장 기본적인 기도이다. 그들은 매일 두 세 번씩 이 기도문들을 낭송하였다. 그리고 쉐마는 신 6:4-9에 근거한 기도문으로 팔레스틴의 유대인 뿐만 아니라 디아스포라와 에센파 등이 주로 사용하였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또다시 새로운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는 그것을 당시의 유대적인 배경에서 찾아야 한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과 유대교 내에는 메시야로 인한 종말을 대비한 부흥운동이 많이 일어났고, 이 운동을 하는 사람들과 단체들도 많았다. 이들은 자신들의 신학적인 이해와 이상과 소망을 담아 표현하는 특별한 기도문을 작성했다.

예수님보다 조금 일찍 활동을 시작한 세례요한이 이끄는 모임 역시 그런 기도문을 가지고 있었다. 주지하다시피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은 모두 처음에 세례요한의 제자들이었으며, 점차 독립하여 하나님의 나라 운동을 시작하였다. 예수님은 세례요한과 일맥 상통하는 하나님 나라 운동을 일으켰으나 세례 요한과는 다른 새로운 이상과 태도를 표방하며 하나님 나라 운동을 이끌었다.

이러한 운동에 세례요한의 제자들 중 일부가 동참하면서 예수 공동체의 이상과 정신을 담을 수 있는 기도문을 요청한 것이다. 그러므로 주기도문은 하나님 백성들의 공동체의 정체성을 가장 집약적으로 나타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쉐마, 카디쉬, 18번 축복기도 등이 유대인들을 특징지우게 하는 기도문이었다면, 주기도문은 주님의 공동체를 특징지우는 기도문인 것이다.

* 당시의 유대 종파들(운동체)

① 바리새파 : 이스라엘 전체를 하나님의 제사장 민족으로 보려는 민족적 이상을 실현하려고 한 중산층 평신도 경건 운동.

② 에센파 : 쿰란 동굴에 은거하면서 성경(구약)을 연구하고 율법을 잘 지키기로 헌신한 부흥 운동.

③ 세례요한 : 회개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대비하려는 운동을 일으킴.

2) 마태복음판 주기도문의 문학적 맥락에서(마 5-7장)

이제 마태복음의 주기도문의 문학적 맥락을 살펴보므로써 주기도문의 목적을 알아보자. 우리는 앞에서 누가복음의 주기도문이 원본이며, 마태는 어떤 의도를 가지고 본문을 변형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마태는 주기도문을 산상수훈의 중심에 의도적으로 위치시켰다. 이같은 사실은 산상수훈의 구조를 살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 산상수훈의 구조

8복(5:3-16)  – 하나님의 백성이 어떤 사람들로 구성되는지를 말함.

   반어적 가르침(5:17-48)-행위를 유발시키는 동기의 내면적 최대한을 규제함.

      종교행위에 대한 가르침(6:1-18) – 자선(6:1-4), 기도(6:5-15), 금식(6:16-18)

   제1계명에 대한 설교(6:19-7:11) – 우상숭배 배격

결론적 권면(7:12-27)  – 실제적인 행위를 강조함.

위에서 보듯이 주기도문은 산상수훈의 중심인 ‘종교행위에 대한 가르침’ 중에서도 중간에 있는 ‘기도’ 부분의 중심에 위치해 있다. 여기서 예수님은 여기서 유대인들의 그릇된 기도를 지적하고, 이방인들의 그릇된 기도를 비판하신다. 그런 후에 주기도문을 말씀하신다.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교수인 스톤하우스(N.B. Stonehouse)는 마태의 산상수훈은 마태 자신이 구어 혹은 문어의 양식으로 전승되어 온 자료들을 수집하고 배열하여 구성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산상수훈 뿐만 아니라 마태복음 전체의 구성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고도의 문학적 기술과 신학적 계획 아래 매우 조직적으로 그의 복음서를 구성하고 배열하였다.

즉, 마태복음의 주기도문은 원래 산상수훈의 문맥에 있는 것이 아니었는데, 마태의 의도에 따라 그것이 산상설교의 문맥으로 이동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마태는 무슨 의도를 가지고 주기도문을 산상수훈의 가장 중심부분에 위치시켰는가? 그것은 주기도문이야말로 하나님의 백성의 근본 도리임을 알리기 위해서이다.

3) 결  론

우리는 지금까지 두 복음서의 주기도문의 문학적 맥락을 살펴보므로 주기도문의 목적을 찾고자 했다. 이 두 복음서의 기록을 통해서 우리는 주기도문이 단순한 기도의 방법이나 표준을 보여주기 위해 제시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주기도문은 단순한 이유(기도의 방법이나 표준)를 훨씬 초월하여 새로운 예수 공동체의 이상을 담은 헌장이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정체성과 하나님의 백성의 근본도리를 보여주기 위해 기록되었다.

그런데 주기도문이 교회의 공적인 기도가 된 배경은 무엇인가? 아마 처음에는 주기도문과 18번 축복기도가 같이 드려졌으나 기독교회가 점차 이방인 선교를 시작하게 되고, 유대교와 기독교가 명백히 관계를 끊으면서 18번 축복기도가 사라지고 주기도문만 남은 것으로 보인다.

5. 주기도문의 구조분석

주기도문은 크게 4개의 단락으로 이루어져 있다. 두 복음서의 주기도문을 비교하면서 이 단락에 대해 살펴보자.

1) 두 개의 주기도문 비교를 통한 구조 파악

단락\복음서마태복음누가복음
하나님의 이름을 부름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아버지여
3개의 ‘당신’ 청원들①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소서② 나라가 임하게 하소서③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①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소서② 당신의 나라가 임하게 하소서③ ‘생략’
3개의 ‘우리’ 청원들①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②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③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옵소서①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②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③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옵소서
송영(doxology)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생략’

(1) 하나님의 이름을 부름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기록이 서로 다르다. 마태복음에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로 기록하고 있으나, 누가복음에는 “아버지여”라고만 기록한다. 그런데 특히 누가복음의 ‘아버지’는 ‘압바’(Abba)라고 언급되어 있다. 압바란 우리말로 ‘아빠’와 같다. 즉, 어린아이가 아버지를 부르는 호칭이다. 예수님은 기도할 때 항상 하나님을 압바라고 불렀다. 그리고 또한 제자들에게도 압바라고 부르라고 가르치셨다(막 14:36 등). 따라서 누가복음판처럼 아빠라고 부르는 것이 원래 본문이다.

마태복음에 “하늘에 계신”이라는 수식어구가 붙은 것은 그것이 초대교회에서 예배용으로 발전하면서 덧붙여진 것이다. 그러나 아빠라는 부름의 뜻을 더욱 선명하게 하기 위해 덧붙인 것이므로 마태복음판이 틀린 것은 아니다. 예배 언어는 대칭 구조를 잘 맞추려는 습관이 있는데, 이 “하늘에 계신”이라는 말을 덧붙임으로써 송영(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과 절적하게 대칭을 이루도록 한 것이다.

(2) 3개의 당신 청원들

마태복음은 당신 청원이 3개이나, 누가복음은 2개이다. 누가는 마지막 “뜻이 이루어지이다”를 생략했다. 그런데 여기서 “뜻이 이루어지이다”는 “당신의 나라가 임하게 하소서”의 부연이다. 이 둘은 사실상 같은 의미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과 땅에서 그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은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늘에서 이미 이루어졌으나 땅에서는 아직 사단의 역사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 그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마태는 왜 당신 청원을 3개로 만들었는가? 그것은 3개로 된 우리 청원과 짝을 맞추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누가 식으로 기도해도 무방하지만, 마태 식으로 하는 것이 예배용으로 훨씬 더 적합하고 풍부한 형식을 갖춘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한 가지 더 관찰할 것이 있다. 그것은 당신 청원 가운데 첫 번째 청원인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소서”에 관한 것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이것은 청원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신앙고백으로 보아야 한다. 유대 관습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말할 때에 반드시 “그의 이름이 거룩히 여겨지이다”라는 식의 자신의 신앙 고백과 자신의 바라는 것을 표현하게 되어 있다. 이와 같은 유대 관습이 바로 여기에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당신 청원은 한 개밖에 되지 않는 셈이다. 즉, “당신의 나라가 임하게 하소서”밖에 없다.

(3) 3개의 우리 청원들

우리 청원은 3개인데, 곧 양식, 사죄, 사단의 시험으로부터의 보호 청원이다. 이 청원들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청원이다.

(4) 송영

마태는 송영을 기록하고 있으나, 누가는 생략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는 앞에서 누가복음의 주기도문이 원본일 것이라고 정의하였다. 그런데 마태복음의 헬라어 사본에 있어서도 연대기적으로 오래된 점에 있어서나 사본의 질에 있어서나 광범위한 지역의 분포에 있어서도 대부분의 우수한 사본에 송영이 없다. 따라서 원래의 주기도문에는 송영이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마태가 자기 마음대로 송영을 붙여 놓았는가? 그렇지 않다. 유대교의 기도관행에는 항상 주님을 축복하는 송영이 있다. 유대인들은 언제나 기도 끝에 송영을 자연스럽게 한다.

그러나 기독교회가 점차 확장되면서 이방인들이 교회에 들어오면서 그들을 가르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마태는, 혹은 마태복음의 나중 사본에 원래 없는 송영을 기도문 끝에 붙였다. 즉, 누가복음에 기록된 주기도문 본문처럼 기도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 이 기도 끝에 송영을 붙였다.

그러므로 비록 예수는 송영 없이 기도를 가르쳐 주었다 하더라도 그 기도 끝에는 예수 시대부터 항상 송영이 있었다. 따라서 마태복음의 나중 사본에 나오는 대로 송영을 하는 것이 옳다.

① 교부 터툴리안은 ‘그의 기도’라는 논문에서 – “주기도문은 ‘우리를 악한 자에게서 구원하소서’까지가 공적인 기도이다. 그 이후에는 각자 개인적인 기도를 덧붙인다.”고 하였다.

② 암브로스는 그의 책 ‘성례전에 관하여’에서 송영이 있는 주기도문을 제시하지 않았으며, 송영이 성경본문에 속한다는 주장도 하지 않고 있다.

③ 동방교회의 전통 : 회중은 “악한 자에게서 우리를 구출하소서”라고 하면, 사제가 송영을 하는 것으로 기도 순서를 마친다.

④ 디모데후서 4:17-18은 주기도문의 요약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송영이 함께 나온다. 본문에서 저자는 주기도문 이후에 송영을 자연스럽게 붙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송영은 그때그때 적절하게 만들어서 자유롭게 했을 것이다. 그런데 송영은 다니엘 7:14에서 영감을 받지 않았을까 한다. 왜냐하면 그 말씀에 보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위임하기 때문이다.

2) 주기도문의 이중 구조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에 따라 우리는 주기도문의 구조가 다음과 같다고 말할 수 있다.

① 하나님의 이름을 부름

② 한 개의 당신 청원(나라가 임하소서)

③ 세 개의 우리 청원(양식, 사죄, 유혹에서의 구원)

④ 송영

이것을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주기도문은 2중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임을 알게된다. 즉, 하나님 청원과 우리 청원이다. 이것에 대해 주목할 점은 두 복음서의 우리 청원들 사이에 접속사(kai)가 나온다는 사실이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주기도문의 구조가 크게 두 부분임을 암시받을 수 있다. 첫째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청원이고, 그 다음은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양식, 사죄, 사단의 시험으로부터의 보호이다.

한편, 이같은 주기도문의 구조는 마태복음 6:33의 내용과 병행을 이룬다. 6:33의 전반부인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한 개의 당신 청원과 같고, 후반부인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는 세 개의 우리 청원과 같다. 따라서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오면 다 해결되는 양식, 죄용서, 사탄으로부터의 시험에서의 보호 등을 요약한다고 볼 수 있다.

6. 주기도문의 내용

1) 아빠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는 것은 예수님의 독특한 어법이다. 이 단어는 원래 아버지를 친근하게 부르는 어린아이의 언어로서 유대의 다른 문헌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하나님을 아빠, 또는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언약 신학의 표현이다. 구약에는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아버지라고 표현한 곳이 15번 정도이며, 간접적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표현한 곳이 13번 정도이다. 그러나 신약은 복음서에서만 해도 170번 이상이나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른다.

구약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것이 주는 의미를 좀더 자세히 말하면 다음과 같다.

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창조자이시다.

②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은 언약을 맺었다.

③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대해 부성적 사랑과 자비를 가지고 계신다.

④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 아버지께 마땅히 행해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러한 아버지를 친근한 단어인 ‘아빠’라고 부름으로써 자신이 하나님의 친아들이심을 강조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사역을 통해서 백성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을 강조했다. 따라서 이것은 기독론적인 서술이다(간접 기독론).

예수님의 ‘아빠’ 사용은 매우 독특하면서도 중요하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서신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로마서 8:15-16과 갈라디아서 4:6을 보자.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원어 : 아빠 곧 아버지)라고 부른다고 말한다. 거기서 바울은 셈족 언어인 ‘아빠’를 먼저 쓰고, 헬라어를 쓰는 로마인이나 갈라디아인들에게 그 아빠가 무슨 뜻인지를 번역해 주기 위해 ‘아버지’를 덧붙인다. 바울이 여기서 의도하는 것은 ‘아빠’라는 단어 사용이다. 그는 아빠라는 단어를 쓰기 위해서 아버지를 사용했다.

그런데 마태는 아빠에다가 “하늘에 계신”을 덧붙인다. 이것은 하나님이 경외받으셔야 할 분임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아빠”라고 하는 것이 친근감을 강조한 것이라면, “하늘에 계신”이라는 표현은 초월성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초월성은 전지전능성을 의미한다. 따라서 마태의 표현은 초월과 내재 또는 거리감과 친근감의 양면이 적절히 강조되는 변증법적 하나님 이해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라는 간구는 청원이라기 보다는 유대 관행에 따른 것으로 일종의 신앙고백이며 찬양이다. 하나님의 초월성, 즉 ‘거룩’이란 말의 원래 뜻은 윤리적 개념이 아니라 물리적 개념이다. 피조물과는 다른 초월적인 존재라는 것을 나타낼 때 ‘거룩’이라는 단어를 쓴다. 그러나 이차적으로 윤리적인 개념이 도출된다.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거룩하신 분이시다.

2) 당신 청원 :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소서

이 기도는 주기도문의 가장 주된 청원이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이 추구하신 하나님의 나라가 정치적인 나라가 아님을 먼저 기억해야 한다. 일부 학자들은 예수님이 민족주의를 배제하는 유대 공동체를 재건하려 했다고 주장하나 이는 오해이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을 당시 유대적인 상황하에서만 이해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예수님이 추구하신 하나님의 나라의 본질과 성격을 살펴보아야 한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언어는 어느 한 가지의 뜻을 나타내는 고착된 스테노 심벌(steno symbol)이 아니라 여러 가지를 동시에 함축하는 텐시브 심벌(tensive symbol)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다스리는 나라라는 뜻 외에도 매우 다양한 의미를 가진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초월적인 운동이며 아담적 실존에서의 회복 운동이다.하나님의 나라는 영생의 나라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주시는 영생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영적인 삶이라는 뜻도 아니고, 시간적으로만 길게 늘어진 영원한 삶도 아니다. 오는 세대, 즉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세상에서의 삶을 말한다. 영생은 내용적으로 아담적 결핍으로부터 해방된 삶이다. 즉, 하나님의 신적 부요함으로 이루어지는 삶이다.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적 삶’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플레로마’(Fleroma), 즉 하나님의 충만하심으로 이루어지는 삶으로서 결핍으로 인한 고난이 더 이상 없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의 나라가 곧 온다고만 선포한 것이 아니라 곧 올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 자신을 통해 실현되어 가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귀신축출과 치유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가 현재 실현되고 있는 증거를 제시했다. 그의 귀신축출과 질병 치유는 단순히 육체의 질병만을 고치는 차원이 아니라 매우 포괄적인 행위로서 인간을 온전케 하는 행위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인본주의적 운동이 결코 아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나 오늘날 일부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인간의 노력에 의해 이루어지는 나라로 이해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하나님의 초월성과 은혜성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말씀한다. 인본주의적 하나님 나라는 결국 자력 구원론을 의미한다. 그러나 자력 구원론은 인간의 한계성 때문에 생기는 인간의 실존(결핍)을 생각할 때 모순되는 이론이다. 예수님의 복음은 그와는 반대로 하나님의 초월로부터 우리에게 은혜로 하나님의 구원의 통치가 온다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구원인 것이다.

3)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양식 청원에 대한 마태와 누가의 기록이 서로 다르다. 마태는 “오늘 우리에게 양식을 주옵소서”라고 했다. 이때 ‘주시다’라는 동사는 부정과거형(aorist)이다. 반면 누가는 ‘주시다’는 동사가 현재형이며, 또한 ‘오늘’이라는 말보다는 헬라어로 ‘날마다’ 또는 ‘그날에 필요한’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누가의 ‘오늘’의 의미는 무엇인가? 여기에 대해 매우 많은 논란이 있는데, 우리는 그것을 출애굽기 16장의 만나 이야기를 참고하여 이해하고자 한다. 주기도문의 이 청원은 출애굽기 16장을 배경으로 하는 것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만나와 메추라기는 각각 아침과 저녁에 주어진다. 그것은 각각 그 날과 그 다음날을 위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주기도문의 양식청원을 ‘지금부터 시작되는 그날 우리에게 양식을 주시옵소서’로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명을 가능하게 해 달라는 기도이다. 즉, 우리의 생명을 보존케 해 달라는 기도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세를 뜻한다.

그러면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세의 내용은 무엇인가?

① 근심하지 않는 태도이다(마 6:22-34).

② 하나님을 통해서만 나의 삶이 가능하다는 신앙고백이다.

③ 하나님을 신뢰하겠다는 서약이다.

④ 우리에게 그런 양식을 달라는 청원이다.

이러한 삶은 바로 안식일적 삶이다. 예수님은 주로 안식일날 병자를 치유하셨다. 안식일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대한 축하(celebration)이다. 그리고 인류가 안식일을 지키는 이유는 종말에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질 온전케 됨을 갈망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안식일에 병자가 나타난 것은 원래의 안식일이 없음을 의미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침으로써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과 그 모습을 이루실 예수님의 메시야됨이 드라마틱하게 나타나는 것이다.

4)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마태는 “우리의 빚들을 사하여 주시옵소서”라고 했고, 누가는 “우리의 죄들을 사하여 주시옵소서”라고 했다. 누가가 이렇게 복수를 써서 ‘죄들’이라고 한 것은 구체적인 죄의 행위들을 가리킨다. 그런데 여기서 누가는 왜 ‘죄들’이라 하고, 마태는 ‘빚들’이라고 했을까? 마태의 ‘빚들’이 원래의 용어이다. 왜냐하면 누가의 죄 용서 청원 두 번째 부분을 보면, “우리도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모두 용서합니다”라고 하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대한 죄를 ‘빚’으로 이해하는데, 주로 이방인들을 독자로 하는 누가는 그런 용어를 사용하면 이방인들이 금전 채무 관계로 오해할 수도 있으므로 죄라고 바꾸어서 기록한 것이다.

그리고 마태는 “우리도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사하여 준 것 같이”라고 완료형을 사용하고 있는 반면, 누가는 “왜냐하면 우리도 모두를 용서하니까요”라는 현재형을 사용하고 있다. 즉, 동사의 시제가 서로 다르며, 누가는 접속사 “왜냐하면”을 사용하고 있다. 예레미야스는 여기서의 완료형을 아람어의 관점에서 보면서 ‘동시성의 완료형’(perfectum coincidentiae)으로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게 되면 이 구절은 “하나님,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 그와 동시에 우리도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용서하겠습니다.”가 된다. 따라서 죄용서에 대한 청원인 동시에 하나님에 대한 서약이다. 이것은 곧 진정으로 주님의 용서를 얻고자 하는 자는 자기의 죄를 버릴 각오를 해야 한다는 뜻이다.

5) 우리를 시험에서 구원하소서

이제 주기도문의 마지막 청원인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를 생각해 보자. 누가복음은 이 청원의 앞 부분만을 사용하여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라고 했는데, 마태는 이 청원의 의미를 더욱 분명히 하기 위해 “악으로부터 구출하여 주소서”를 덧붙였다. 마태는 전반적으로 기도문을 예배용(Liturgy)으로 발전시키면서 원래의 본문을 많이 확대하였다. 그러므로 이 기도 역시 마태가 확대한 것이다.

여기서의 시험(히, 마사; 헬, 페이스몬)은 시험(test)과 유혹(temptation)이라는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어떤 때는 따로 쓰이고 어떤 때는 같이 쓰인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시험하기는 하지만 유혹하지 않는 분이다. 그리고 이 청원의 본문은 “우리를 페이스몬으로 끌어들이지 마소서”라고 되어 있다. 여기에 사용된 ‘끌어들인다’는 말은 “우리가 그 속에 빠져 가지 않도록 허용하지 말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페이스몬을 유혹으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는 사단의 유혹이 전제된다. 그렇기 때문에 마태는 뒤에 “악(악한 자로 보아도 됨)으로부터 우리를 구출해 주소서”라고 덧붙인 것이다.

그런데 사단과의 전쟁(영적 전쟁)을 너무 신비주의적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구원론적 열광주의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사단을 너무 무시하는 것도 문제지만, 지나치게 모든 문제를 사단과 결부하여 이해하는 것은 옳지 않다. 영적 전쟁이란 공상 소설 이야기적 개념이 아니라 복음의 진리를 전하고, 의를 실천하는 지극히 현실적인 개념이다. 사단은 인간의 이성과 지성과 감성을 포함하는 전 영역을 공격한다. 따라서 날마다 사단의 시험에 빠지지 말게 해 달라고 기도하면서 동시에 적극적으로 제자도의 삶을 살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6) 송영 :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이 송영은 앞에서 말했듯이 마태(혹은 나중 사본)가 주기도문을 예배용으로 사용하기 위해 덧붙인 것이다. 송영을 지금 우리말로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이는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송영은 주기도문의 주제인 하나님의 나라와 연관된다. 이것은 그 나라의 주인이신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찬양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의 신앙고백이기도 하다.

7. 결론적 교훈

지금까지 우리는 주기도문을 살펴보았다. 주기도문은 예수님이 시작한 하나님 나라 운동으로 말미암아 불러모아진 하나님 나라에 들어온 백성에게 주어진 이상과 소망을 나타낸 것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주기도문의 가장 주된 청원은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이다. 이 청원은 하나님의 나라의 임함과 함께 내가 하나님의 통치를 받겠다는 서약을 함께 담고 있다.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기도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겠다는 청원인 동시에 하나님 앞에서의 서약이며 신앙고백이다. 사죄의 청원은 죄 용서를 받은 자로서 이웃의 죄를 용서해 주겠다는 것이 포함된 기도이다. 또한 시험으로부터의 보호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자로서 때로 사단의 유혹에 노출되는데 그 사단에 순종하지 않게 해 달라는 기도이다. 이 기도 역시 간구와 서원을 함께 가지고 있다.

주기도문은 다음의 면에서 참으로 탁월한 기도문이다.

① 주기도문이야 말로 진짜 기도이다.

이 기도는 내가 청원한 것을 내가 실천하겠다는 서약이 함께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이 기도는 중언부언하는 이방인의 기도, 내 욕심만 채우면 그만이라는 세상 사람들의 기도와 대조된다. 그리고 이 기도는 바리새인들의 외식적인 기도와도 대조된다. 오늘날 설교조의 기도, 자기를 드러내는 기도, 광고와 같은 기도, 아부성 기도가 판을 치고 있는데 주기도문은 그런 잘못들과 대조된다.

② 주기도문은 짧고 간결하다.

주기도문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온당한 삶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필요를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그리고 매우 구체적인 청원(양식, 죄용서, 유혹에서의 보호)을 기록하므로써 우리의 기도가 실제적인 기도여야 함을 가르쳐 준다.

③ 주기도문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하늘에 계시는 초월자에 대한 경외심과 그분이 우리의 아빠가 되신다는 친근감을 아주 적절하게 유지해 준다.

초월자에 대한 경외심은 나중에 송영으로 다 한 번 확인된다. 초월자에 대한 경외심이 전제되지 않으면,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의 대상이 될 필요도 없고 될 수도 없다. 그런 경외심과 함께 하나님은 우리의 아빠라는, 그래서 우리가 그의 나라의 상속자라는 사실을 주기도문은 가르쳐 준다.

④ 주기도문은 기도의 주체가 ‘나’가 아니라 ‘우리’임을 가르쳐 준다.

주기도문은 우리의 언어로 하는 기도로 되어 있다.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 속에서 우리는 항상 이웃과의 관계를 생각해야 하고 내가 그들에게 형제 노릇해야 함을 배운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께 받은 양식을 나눌 생각을 해야 하고, 그들을 용서해야 하고, 그들이 사단의 유혹에 빠져 있을 때 위로와 힘을 주어야 함을 배운다.

⑤ 이 기도는 청원 속에 항상 서원이 들어있기 때문에 우리를 수동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적극적으로 만든다.

주기도문은 하나님께 우리가 비는 것이 실현되는 데 있어서 우리 쪽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하겠다는 서원을 하므로 우리로 하여금 적극적으로 제자도를 실천하는 참된 제자가 되게 한다.

주기도문 강해 _ 김세윤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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