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닫지 못하게 하려”고 비유를 사용한다?신학자들의 난제를 반어법으로 풀기
막 4:11-12에 대해서 논의해야 할 이유
로버트 스타인은 『예수님의 비유』에서 마가복음 4장 11-12절을 신학자들의 난제로 규정했다. 그는 이 “난제를 풀기 위하여 숱한 해결책이 제시되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신학자들이 내놓은 그 어느 “해결책”을 읽어 보아도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홍창표 교수는 『하나님 나라와 비유』에서 마가복음 4장 11-12절에 관한 신학자들의 견해를 비평학자들의 견해와 복음주의 학자들의 견해로 나누어 정리하고 있다. 그런데 그들의 설명을 읽어보면 말은 많지만 실속은 없다. 사이먼 키스트메이커는 『예수님의 비유』에서 이 구절을 이해하는 데에 꼭 필요한 문맥에 관한 말을 하려다가 그 역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막연한 말로 끝내고 만다. 문제는 어디서도 속 시원한 설명을 찾을 수 없다는 데에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마가복음 4장 11-12절은 반어법적인 진술인데, 아무도 반어법에 착안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구절이 신학자들에게 “난제”로 남는다. 달리 말하면, 스타인이 말한 이 “난제”는 반어법(irony)으로만 풀 수 있다. 반어법은 수사법의 한 종류로 문학작품에 자주 나오는 표현방법이다. 반어법에 익숙한 문학연구자의 입장에서 보면 마가복음 4장 11-12절은 분명히 반어법적인 진술이다.
신학자들은 여호와와 예수님을 신성시한 나머지 그분들은 진리만을, 당신들의 진심만을 말씀하시는 분들로 믿고 있다. 그래서 그분들은 전혀 허점을 보이지도 실수하지도 않는 분들, 빈정거리거나 경멸하거나 뒤틀린 속내를 드러내는 반어법적인 말씀을 하시지 않을 분들이라고 믿는다. 이러한 믿음으로 인해서 그들은 성경에 나와 있는 반어법을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은 이사야서 6장 10절과 마가복음 4장 11-12절에 나오는 여호와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여호와와 예수님도 인간처럼 기뻐하거나, 후회하거나, 화를 내거나, 저주하거나, 슬퍼하거나, 울거나, 두려워하기도 하셨다. 그렇다면 그분들도 우리처럼 빈정거릴 수도, 경멸할 수도, 뒤틀린 속내를 드러낼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러한 가능성을 열어놓기만 하면 여호와와 예수님도 당신들의 속내를 드러내기 위해서 반어적으로 진술할 수도 있다는 데에 생각이 미치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반어법적 진술의 예를 이사야서 6장 10절과 마가복음 4장 11-12절에서 발견한다. 이 두 곳에서의 진술이 반어적 표현이라는 데에 착안하기만 하면 그들의 “난제”는 아주 쉽게 풀린다.
막 4:11-12에 대한 의문
예수님의 비유를 읽다가 마가복음 4장 11-12절에 오면 누구나 어리둥절해진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이는 그들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병행구절인 누가복음 8장 10절에도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그들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고 되어 있다.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한다는 말씀은 인간으로 하여금 깨닫게 해서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사역의 목적과 상치되기 때문에 독자들은 어리둥절해질 수밖에 없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명시되어 있다. 이렇게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오신 분이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는 행동을 하시다니! 이게 무슨 말인가?
그리고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것은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게 하려는 것이라는 성경구절과도 맞지 않는다. 마가복음 4장 33절에 “예수께서 이러한 많은 비유로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대로 말씀을 가르치시되”라고 되어 있다. 영어성경 NIV에 보면 “as much as they could understand”로 되어 있는데 우리말 성경의 “알아들을 수 있는 대로”에서 “대로”는 “as much as”로서 “많이”를 의미한다. 따라서 청중이 되도록 많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비유를 들어 가르치셨다는 말이다. 마태복음 13장의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 .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34-35)는 말씀도 비유 사용의 긍정적인 면을 드러낸다.
따라서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비유를 사용하신다는 마가복음의 말씀이나 같은 취지를 나타내는 누가복음의 기록은 예수님이 복음 선포를 위해서 오셨다는 사실뿐 아니라, 복음을 잘 이해시키려고 비유를 사용하셨다는 예수님 자신의 말씀과도 맞지 않는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여기서 성경의 전체적인 문맥과는 맞지 않는, 아니 정반대되는 말씀을 하셨을까?
마가복음 4장과 누가복음 8장의 “깨닫지 못하게 하려”고 비유를 사용하신다는 말씀은 예수님의 비유를 이해하려는 독자들에게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그 구절이 신학자들도 “난제”라고 하면서 자기들 나름대로 한 마디씩 하고 있으니 일반 독자들은 어느 장단에 춤을 추어야 할지 당혹스럽다. 한국에서는 마가복음 4장 11-12절을 문자적 의미 그대로 받아들여서 ‘은폐하기 위해서’ 비유를 사용하셨다고 해석하는 것이 대세이다. 정말 그 해석이 맞을까?
이 걸림돌을 제거하기 위해서 마가복음 기자가 인용한 이사야서 6장 9-10절의 문맥을 살피고 이사야서의 상황과 마가복음의 상황을 비교해 보기로 하겠다.
사 6:10에 대한 의문
이사야서 6장 8절에 보면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는 여호와의 음성을 이사야가 듣고 자기가 가겠다고 자원한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이사야를 보내시면서 9절과 10절에서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고 이사야에게 명하신다. 여호와께서는 우둔한 혹은 악을 행하는 백성들을 깨우쳐서 당신에게 돌아오도록 하시려고 선지자를 보내시는 것이 상례이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보내시면서 백성이 복음을 듣지 못하게 그리고 구원을 받지 못하게 하라고 명하신다. 여기서 우리는 여호와의 명령이 보통 선지자들을 보내는 목적과 정반대인 것을 발견한다. 어찌된 일인가?
여호와께서 죄악에 빠진 백성을 구원하시려는 당신의 뜻을 이사야를 통해서 백성들에게 전하시려는 것이 이사야서 전체에서 드러난다. 6장에서 이사야가 여호와의 부르심을 받기 전, 1장에서 5장까지에서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한 이사야의 계시가 나온다. 그 계시에서 보면 여호와께서는 유다의 죄악상을 지적하시고 여호와의 심판이 임박해 있음을 경고하신다. 그러나 일면 회복에 대한 소망의 메시지를 주기도 하신다. 이 회복의 영광은 죄를 깨닫고 돌아서는 자들에게 주어진다. 다시 말하면, 여호와께서는 그 계시에서 당신이 사랑하시는 백성이 당신의 법도에서 벗어나는 것을 경계하시는 한편, 그들이 심판을 면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하신다. 한 마디로 말해서, 그들을 깨우치려고 애쓰신다.
6장에서 자원하여 나서는 이사야는 여호와께서 자신을 보내시는 이유를 1장에서 5장까지의 계시를 통해서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사명은 그가 1-5장의 계시를 통해서 본 여호와의 뜻대로 백성들에게 그들의 죄악의 결과에 대해서 경고하고 회복의 기회가 있음을 알려주는 일이다. 다시 말해서, 백성을 깨우치는 일이다. 스랍이 제단의 숯을 가지고 와서 이사야의 입에 대며 그의 악을 제거하고 죄를 사하여줄 때, 이 죄 사함이 백성들에게도 이루어질 것을 그는 예견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사야는 나가서 북 왕국 이스라엘과 남 왕국 유다 사이의 전쟁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그들이 장차 심판을 받을 것을 경고하는 한편 평강의 나라를 세우실 메시아의 탄생을 예언한다. 이사야는 그 백성에게 평강의 나라를 세워주실 여호와의 은혜를 감사하며 만민이 함께 여호와를 찬양하자고 말한다. 다음에 이사야는 유다를 괴롭히는 바벨론, 앗수르, 불레셋, 모압, 애굽 등의 주변국들이 멸망할 것을 예언하고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장차 들어가서 살 메시아 왕국을 찬양한다. 여호와는 당신의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기 때문에 인내하는 자들은 구원을 받는다는 소망을 선포한다. 간단히 말해서, 그는 죄를 범하는 백성들을 깨우쳐서 그들이 여호와에게 돌아오게 하려고 노력한다. 그러한 일을 이사야가 자의적으로 한 것이 아니고 여호와의 말씀을 받아서 수행한다.
그런데 여호와께서는 이사야를 보내시면서 6장 10절에서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1장에서 5장까지의 계시에 나타난 백성들에 대한 여호와의 사랑 그리고 7장 이하에서 타락한 백성들을 깨우쳐서 여호와에게 돌아오게 하려고 이사야가 전한 여호와의 말씀과 맞지 않는다. 맞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정반대이다. 앞에서 지적한 대로, 이 6장 10절의 말씀은 우리가 알고 있는 선지자의 일반적인 사명과 맞지 않을 뿐 아니라, 이 구절 앞뒤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과도 맞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문맥과 반대이다. 참 이상하다.
반어법에 대한 설명
수사법에 반어법(irony)이라는 것이 있는데, 반어법은 실재와 표현된 말이 상반될 때 성립한다. 어느 사람이 실재와 반대되는 말을 했을 때 그 반대로 표현된 말을 반어법적 진술이라고 한다. 반어법적으로 말하는 사람은 실재와 반대되는 말을 통해서 빈정거림, 비난, 경멸, 혹은 뒤틀린 속내를 표현한다. 예를 들면, 비오는 날 누가 “참 좋은 날씨야.”라고 말한다면 그 말이 실재와 상반되기 때문에 반어법이 성립된다. 그렇게 말한 사람은 비가 와서 그의 계획에 차질이 생겼거나 불편해졌기 때문에 심사가 뒤틀려서 빈정거리는 투로 말하고 있다. 이 말을 들은 그의 친구는 “이 사람 오늘 몹시 기분이 나쁜 모양이군. 기분을 건드리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이 좋겠는 걸.”하고 생각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그 말을 한 사람의 친구는 “참 좋은 날씨야.”라는 말을 듣고 날씨가 좋다고는 절대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비가 오는 날 날씨가 좋다고 말한 것은 실재와 반대되는 말을 한 것이니까. 정신박약자가 아니라면 어느 누구도 그 말을 듣고 그날 날씨가 좋다고는 믿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반어법적 표현이라도 위와는 다른 경우가 있다. “저렇게 착한 사람은 세상에 둘도 없지.”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 사람이 온갖 못된 짓을 다하고 다니는 사람인 것을 잘 아는 사람이 그 말을 들었다면 그 말이 실재와 반대로 표현된 반어적인 것임을 알기 때문에 그 망나니를 착한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게 말한 사람이 그 망나니를 빈정대고 있거나 몹시 경멸한다고 생각할 뿐이다. 그러나 그 사람이 형편없는 망나니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그 말을 듣는다면,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가능성이 크다. 반어법적 진술은 사실과 반대이기 때문에 절대로 그 말을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반어법에서 중요한 것은 반어적으로 말한 사람의 기분이 그 반어법적 진술을 통해서 전달된다는 점이다.
문장에서 어떤 말이 문맥과 맞지 않을 때 독자는 그 말이 반어적 표현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어떤 말이 앞뒤의 내용과 반대로 사용된 반어법적 표현이면, 그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반어적으로 말한 “저렇게 착한 사람은 세상에 둘도 없지.”를 말의 내용 그대로 받아들여서 그런 착한 사람과 사업을 같이 하겠다고 나서거나 그 남자와 진지하게 사귀겠다고 나섰다가는 파산을 당하거나 신세를 망치게 된다.
사 6:10의 문맥과 반어법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사야서의 전체 문맥을 고려할 때 6장 10절에 기록된 여호와의 말씀은 분명히 앞뒤 내용과 맞지 않는다. 따라서 이 진술은 반어법적인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이사야가 가겠다고 자원했을 때, 그는 1장과 5장까지의 계시를 통해서 선하신 여호와의 뜻을 잘 알고 그 뜻을 전하겠다고 결심하고 있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고 말씀하셨을 때 이사야는 그 말씀이 여호와의 진심과는 반대가 되는 반어적인 말씀인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말씀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만약 그때 이사야가 여호와의 말씀이 반어법적 진술인지 모르고 그 말씀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다면 그 말씀이 자기가 생각하고 있던 자신의 사명과는 반대이기 때문에 “정말 회복의 소망은 전하지 않아야 하나요?”라고 물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여호와의 말씀이 반어법적 표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말씀을 듣고는 “백성들이 당신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으니까 여호와의 마음이 몹시 상하셨구나”라고 생각했을 뿐 그 말씀이 여호와의 진심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사야는 반어적으로 말씀하실 만큼 불편해진 여호와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아무 말 없이 그 자리를 물러나서 여호와의 상한 마음을 풀어드리기 위해서 아주 열심히 여호와의 선한 뜻을 전했다.
그러면 여호와께서 왜 이러한 반어법을 쓰셨을까? 여호와는 아무리 경고하고 달래도 백성들이 당신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옆길로 나가는 것을 안타까워 하셨다. 그 백성이 여호와의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여호와께서 그들을 선한 길로 인도하시는 것을 보아도 그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안타까움을 넘어 화가 났다. 화가 치민 여호와께서는, 반어법적으로 말씀하신 6장의 직전에서, 악한 백성들에게 대해서 세 번이나 반복해서 “화 있을 진저”(5:21-23)라고 저주하셨다. 여호와께서는 말 안 듣는 백성에 대해서 그들을 저주하실 만큼 화가 나서 반어법적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이 반어법적 표현을 통해서 여호와께서는 당신의 마음이 많이 상해 있다는 것을, 당신의 말을 듣지 않는 백성들이 미워졌다는 당신의 속내를 드러내셨다.
막 4:11-12의 문맥과 반어법
예수님의 경우도 비슷하다. 예수님이 마가복음 4장에서 이사야서의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외부인들이 이해하지 못하게 하려고 비유를 사용한다고 말씀하신 것은 당신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공격해 오는 무리들에 대해서, 이사야서의 여호와와 마찬가지로, 참담한 심정이었기 때문이다. 깨닫지 못하게 하려고 비유를 사용하신다고 말씀하시기 직전의 3장을 보면 예수님은 사람들의 고집스러운 불신과 강한 반대에 부딪친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5)라고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은 그들이 당신의 말씀을 불신하는 데에 화가 났다.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는 고사하고 사람들은 예수님이 미쳤다고 말했고, “서기관들은 그가 바알세불이 지폈다 하며 또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22)고 말했다. 특별히 예수님이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고 사람들이 말했을 때 예수님은 역정이 나서 “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되느니라”(3:29)고 그들이 저주받을 것을 언급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이사야서에서 사랑하는 백성을 저주하셨던 여호와의 심정과 마가복음에서 당신이 구원해야 할 사람들을 저주하시는 예수님의 심정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발견한다.
이제 우리는 이사야서의 여호와께서 백성들에게 역정이 난 상황과 예수님이 처하신 상황이 아주 유사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호와께서 백성을 선한 길로 인도하시려고 애를 쓰셨지만, 그들은 귀를 막고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서 사악한 길로 나갔다. 예수께서도 유대인들에게 알아듣기 쉽게 설명하려고 비유까지 동원하면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셨지만, 그들은 그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예수님을 비난하고 공격해 왔다. 이때 예수님은 이사야서에서 반어법적으로 말씀하신 여호와의 심정을 이해하고 이사야서를 인용하면서 당신도 여호와처럼 반어법적으로 말씀하셨다. 당신의 불편한 심기를 반어법적 표현을 통해서 나타내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사야서의 여호와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심적으로 깊은 상처를 받았다는 사실이 이 반어법적 진술을 통해서 분명히 드러난다.
우리는 앞뒤의 내용과 반대가 되는 예수님의 말씀이 반어법적 표현이라는 것을 알았으니, 여호와의 반어법적 말씀에 별로 마음 쓰지 않았던 이사야처럼, 우리도 예수님의 반어법적 표현의 내용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 당신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의 심기가 아주 불편하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으로 족하다. 반어법에 대한 설명에서 언급한 것처럼, 반어법적 진술은 사실과 반대이기 때문에 그 진술의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엉뚱하게 판단하게 된다. 다시 말하지만, 그 진술의 내용에 신경을 쓸 필요가 전혀 없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진의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기 때문에 마가복음 4장 12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이 반어법적 표현이라는 것을 파악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외인에게는 감추고 제자들에게는 알려주었다고 말씀하셨지만, 그들 역시 외인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했다. 또한 그들은 외인과 마찬가지로 비유의 의미를 몰라서 주님에게 질문했다. 그리고 예수님이 “너희가 이 비유를 알지 못할진대 어떻게 모든 비유를 알겠느냐”고 그들을 책망하실 때 제자들은 주눅이 들어서 그들에게도 천국의 비밀이 감추어져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예수님이 외인을 배제시키는 것처럼 말씀하신 것은 외인들이 당신을 노골적으로 불신하고 공격해서 그들에게 화가 났기 때문이다.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들도 예수님이 구원하셔야 할 대상이다.
실상 제자들은 외인과 마찬가지로 힘으로 평화를 가져다 줄 메시아를 대망하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난다고 반복해서 예고하셨을 때, 주님이 힘 있는 메시아이시기를 바랐던 그들은, 그들의 고정관념으로 인해서, 그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달리 말하면,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에게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는 귀가 없었다. 말씀을 들으면서도 그 말씀의 의미를 잘 몰랐기 때문에 그들은 가끔 엉뚱한 소리를 해서 예수님의 마음을 답답하게 해드렸다. 이렇게 예수님의 인간구원의 사명을 파악하지 못하는, 예수님이 이사야서에 예언된 메시아임을 알지 못하는 그들에게는 주님의 말씀이 반어법적 표현이라는 것을 알 만한 안목이 없었다.
이제 마가복음 4장 11-12절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을 반어법적 진술로 이해하는 것은 독자들의 몫이다. 그들은 복음서에 명시된 대로 예수님의 사명이 천국복음을 전하는 일이라는 사실과 예수님 자신이 말씀하신 대로 비유를 사용하시는 것은 쉽게 이해시키려는 것임을 알고 있다. 예수님의 언급이 없었다 하더라도, 비유 사용은 쉽게 잘 이해시키기 위해서라는 사실이 예수님의 비유에서 잘 드러난다. 감추기 위해서가 아니고 드러내기 위해서 비유를 사용한다는 것은 문학적 상식이기도 하다. 그런데 11절에 기록된 예수님의 비유에 대한 부정적 말씀이 예수님의 비유에서 나타나는 긍정적인 면과 반대일 때, 나아가서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예수님의 인간구원의 사명과 “깨닫지 못하게 하려”고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맞지 않을 때, 독자들은 그 언급이 반어법적 진술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마 13:13의 진술
마태복음 13장 13절에 나오는 병행구에서는 반어법이 사용되지 않았다. 여기에는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예수님은 당신이 비유로 말씀하시는 것은 깨닫지 못하는 그들을 깨닫도록 도우려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14절과 15절에서 예수님은 “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 이루어졌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예수님이 이사야서를 그대로 인용한 것으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있지만, 실상 이 말씀은 이사야서나 마가복음의 말씀과 달리 반어적으로 표현되지 않았다. 그들이 눈을 감은 것은 고침을 받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라고, 그들이 고정관념을 버리지 않고 귀를 막고 있기 때문에 고침을 받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마태복음 기자는 예수님이 인용하신 이사야서에서 반어법적 표현을 제거했다. 신학자들조차 그 반어법적 표현을 난제로 삼을 것을 마태복음 기자는 예견했던 것일까? 그 결과 독자들이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의 반어법으로 인해서 겪는 혼란이 없어졌다. 그런데 마태복음 기자는 그가 원하는 하나는 얻었지만, 다른 하나는 잃었다. 이 다른 하나, 즉 반어법적으로 말씀하실 만큼 예수님의 마음이, 외부인들의 비난으로 인해서, 많이 상하셨다는 사실이 그 문맥에서 중요한데 말이다. 그 반어적 진술로 인해서 외부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분노가 크게 나타날수록 그들을 구원하려고 노력하는 그분의 인내와 사랑이 더욱 돋보일 테니까.
난제를 풀려는 헛된 소동
반어법적으로 표현된 마가복음 4장 11-12절의 내용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서 진지하게 논의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국내외의 신학자들이 그 반어법적 표현을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것은 그들이 주님의 말씀이 반어법적 표현이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진심과는 반대로 표현된 말씀을 가지고 “난제”라고 생각하면서 그 “난제를 풀기 위해서 숱한 해결책”을 내놓으려고 하는 것은 헛된 일이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예수님의 반어법적인 말씀은 “은폐하려는” 것과 아무 상관이 없다. “깨닫지 못하게 하려”고 비유를 사용하신 것도 아니다. 반어법적으로 표현된 말의 내용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얼간이가 되거나 실수하게 마련이다.
결론적으로, 이사야 6장 10절의 여호와의 말씀은 문맥과는 반대되는 반어법적인 진술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이사야 6장 10절을 인용하면서 말씀하신 마가복음 4장 11-12절 역시 반어법적인 진술이다. 그런데 반어법적인 진술은 반어라는 말이 의미하듯이 사실과 반대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따라서 사실과 다른, 정반대되는 내용을 가지고 사실인 것처럼 진지하게 논의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예레미아스처럼 여러 사본을 참고해서 본문을 재구성하여 의미를 찾아내려고 해도, 원어의 문법을 따져서 설명을 하려고 해도 시원한 답을 찾아낼 수가 없다. 한 마디로, 백약이 무효이다. 잘못된 진단의 결과 나온 처방으로 병을 고칠 수는 없는 일이다. 예수님은 그 반어법적인 진술을 통해서, 이사야서의 여호와와 마찬가지로, 당신을 비난하고 공격해 오는 사람들 때문에 마음이 아주 상해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싶었을 뿐이다.
출처 : 당당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