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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스데반의 순교

스데반의 설교


하나님을 가둘 수 없습니다

본문: 사도행전 7장 2~53절

사도행전 7장에는 신약성경에서 가장 긴 설교 가운데 하나인 스데반의 설교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설교를 처음 읽으면 조금 이상하게 느껴집니다. 스데반은 지금 편안한 자리에서 성경을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스데반을 고발했고, 그의 목숨까지 위태로운 상황입니다.

스데반에게 씌워진 혐의는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성전을 거슬러 말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모세의 율법을 거슬러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제사장이 “이것이 사실이냐?”라고 묻자, 스데반은 곧바로 자신을 변호하지 않습니다. 대신 아브라함의 이야기부터 시작합니다. 그리고 요셉과 모세, 이스라엘 백성과 다윗과 솔로몬의 이야기를 차례로 들려줍니다.

왜 스데반은 모두가 이미 알고 있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다시 이야기했을까요?

스데반은 단순히 역사를 요약하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반복되어 온 한 가지 모습을 보여 주려고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구원자를 보내셨지만, 사람들이 그 구원자를 알아보지 못하고 거절했다는 사실입니다.

먼저 스데반은 요셉의 이야기를 꺼냅니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특별한 계획을 가지고 사용하실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형들은 요셉을 시기했습니다. 결국 요셉을 이집트에 노예로 팔아버렸습니다.

형들은 요셉을 제거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집트에 끌려간 요셉과 함께하셨습니다. 그리고 요셉을 통해 가족과 많은 사람을 기근에서 살리셨습니다.

형들이 버린 사람이 오히려 그들을 구원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어서 스데반은 모세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모세는 고통받는 이스라엘 백성을 돕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세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모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가 당신을 우리의 지도자와 재판관으로 세웠습니까?”

사람들은 모세를 밀쳐냈습니다. 모세는 결국 광야로 도망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모세를 다시 이집트로 보내셨습니다. 사람들이 거절했던 모세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구원할 지도자와 해방자로 세우셨습니다.

요셉도 거절당했습니다. 모세도 거절당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언자들도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스데반은 예수님을 “의로운 분”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의로운 분마저 배신하고 죽였습니다.

스데반이 말하려는 핵심은 분명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정작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이 자신들의 기대와 다를 때, 하나님의 사람을 거절했습니다.

요셉은 노예의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돌아온 도망자의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은 권력자의 모습이 아니라 가난한 목수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원자는 사람들이 기대했던 모습과 달랐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스데반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스데반을 고발한 사람들은 성전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이 하나님께서 계시는 거룩한 장소라고 믿었습니다.

물론 성전은 소중한 곳이었습니다. 성전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장소였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가운데 계심을 보여 주는 상징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점차 성전을 하나님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성전이 있기 때문에 자신들은 안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으니 자신들의 믿음에는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께서 성전에만 계신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약속의 땅에 들어오기 전, 메소포타미아에서 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집트에 팔려간 요셉과 함께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미디안 광야에서 모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모세가 불붙는 떨기나무 앞에 섰을 때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다.”

그곳은 성전이 아니었습니다. 예루살렘도 아니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광야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곳에 나타나시자 광야가 거룩한 땅이 되었습니다.

거룩한 장소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계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계시기 때문에 그곳이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이 순서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건물 안에 갇혀 계신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정해 놓은 장소에서만 일하시는 분도 아닙니다.

스데반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지극히 높으신 분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곳에 살지 않으십니다.”

성전이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전 자체가 악하다는 뜻도 아닙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성전을 통해 하나님을 붙들어 두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여기 계신다.”
“하나님은 우리 편이시다.”
“우리는 성전을 가지고 있으니 안전하다.”

하지만 그들은 성전 안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면서도,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님을 성전 밖으로 끌어내어 죽였습니다.

성전을 지키겠다고 하면서 성전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거절한 것입니다.

스데반의 설교는 당시 사람들에게만 주어진 말씀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질문합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우리가 원하는 틀 안에 가두려고 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이렇게 일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사용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방식이 가장 옳습니다.”
“내가 속한 교회와 전통만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중심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순간, 우리도 성전을 붙잡았던 사람들과 같은 실수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사람을 통해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원하지 않는 환경을 통해 우리를 인도하실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실패라고 생각했던 일을 새로운 시작으로 사용하실 수도 있습니다.

요셉이 팔려 간 이집트에서도 하나님은 일하셨습니다.

모세가 도망간 광야에서도 하나님은 일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신 십자가에서도 하나님은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은 사건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새로운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스데반이 죽은 뒤 예루살렘 교회에는 큰 박해가 일어났습니다. 성도들은 예루살렘을 떠나 여러 지역으로 흩어졌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교회가 무너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흩어진 성도들은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했습니다.

복음은 예루살렘을 넘어 사마리아로 전해졌고, 마침내 이방인들에게까지 전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흩어짐을 통해 복음을 확장하셨습니다.

더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을 때, 그 장면을 지켜보던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사울이었습니다.

사울은 스데반의 죽음에 찬성했고, 교회를 박해했습니다. 그러나 훗날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 바울이 되었습니다.

스데반은 그 자리에서 죽었지만, 그의 증언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스데반이 선포했던 복음은 훗날 바울을 통해 세상 곳곳에 전해졌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만든 울타리 안에 갇히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성전보다 크십니다.
우리의 전통보다 크십니다.
우리의 경험보다 크십니다.
우리의 판단과 계획보다 크십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하나님을 내가 이해할 수 있는 크기로 줄이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내가 정해 놓은 생각을 내려놓고, 지금도 살아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기대하지 않은 방식으로 일하실 때에도 그분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을 겉모습만 보고 밀쳐내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내가 만들어 놓은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믿고 있는 것입니까?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내가 듣고 싶은 말씀만 듣고 있는 것입니까?

나는 하나님께서 새롭게 일하시는 것을 기뻐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익숙하지 않다는 이유로 거절하고 있습니까?

스데반의 설교는 우리에게 경고합니다.

성전을 붙드는 손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원자를 밀쳐내는 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신앙의 형식을 지키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거절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많이 알고 예배를 열심히 드리면서도, 하나님께서 내 생각을 바꾸려고 하실 때 완고하게 저항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의 생각 속에 가두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디로 인도하시든 따라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누구를 통해 말씀하시든 겸손히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계획을 넘어 새로운 길을 여실 때 믿음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스데반의 설교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만든 집 안에 갇혀 계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움직이시며, 사람을 부르시고, 새로운 길을 여시며,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는 이러해야 합니다.

“하나님, 주님을 제 생각 속에 가두지 않게 해 주십시오. 제가 원하는 방식만 고집하지 않게 해 주십시오. 주님께서 보내신 말씀과 사람을 알아보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새로운 길을 믿음으로 따라가게 해 주십시오.”

그렇게 하나님의 크심을 인정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덧붙이는 말 — 성령 하나님을 이용하지 않고 따라가는 신앙

마지막으로 스데반의 설교를 우리 자신에게 비추어 보고 싶습니다.

스데반의 설교에서 사람들이 범한 가장 큰 잘못은 하나님을 자신들이 만든 틀 안에 가두려 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성전을 가지고 있었고 율법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당연히 자신들의 편에 계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과 계획 속에 갇혀 계시지 않았습니다.

이와 같은 태도는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반복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는 성령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때로는 성령 하나님을 우리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힘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 제가 원하는 일이 잘되게 해 주십시오.”

“성령님, 제가 세운 계획을 이루어 주십시오.”

“성령님, 제가 원하는 능력과 결과를 주십시오.”

물론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할 수 있습니다. 어려울 때 힘을 구하고, 지혜가 필요할 때 지혜를 구하며,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성령 하나님을 내 계획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여기는 태도입니다.

성령 하나님은 우리가 필요할 때 불러내어 사용하는 능력이 아닙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뜻을 이루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우리가 섬기고 순종해야 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는 “성령님, 제가 하려는 일을 도와주십시오”에서 멈추지 않아야 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령님, 제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가르쳐 주십시오.”

“제가 세운 계획이 주님의 뜻과 다르다면 내려놓게 해 주십시오.”

“제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이끄시는 곳에 머물게 해 주십시오.”

우리는 종종 성령님을 내가 있는 자리로 모셔 오려고 합니다. 내가 정해 놓은 계획, 내가 원하는 관계, 내가 추구하는 성공 안으로 성령님을 모셔 오려고 합니다.

그러나 참된 신앙은 성령님을 내 자리로 모셔 오는 것만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계시는 자리로 내가 옮겨 가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진리를 말씀하시는 곳에 머무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사랑하게 하시는 자리에서 사랑하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용서하게 하시는 자리에서 용서하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낮아지게 하실 때 낮아지고, 포기하게 하실 때 포기하며, 섬기게 하실 때 섬기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이 계신 곳은 언제나 편안하고 안전한 곳만은 아닙니다.

스데반은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했기 때문에 모든 어려움을 피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성령으로 충만하여 사람들이 듣기 싫어하는 진실을 말했습니다. 박해를 받았고, 마침내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성령님은 스데반을 도와주시지 않은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님은 스데반을 고난에서 무조건 벗어나게 하신 것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도 예수님을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자신을 죽이는 사람들 앞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게 하셨고, 마지막까지 그들을 용서하게 하셨습니다.

스데반은 죽음을 피하지 못했지만, 성령님이 계신 자리에서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그가 머물렀던 자리는 진실을 증언하는 자리였습니다. 원수를 용서하는 자리였고, 자기 생명보다 예수님을 더 귀하게 여기는 자리였습니다.

우리도 성령님을 믿는다는 것을 단지 능력 있는 삶, 일이 잘되는 삶, 문제가 해결되는 삶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성령 충만한 삶은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얻는 삶이 아닙니다. 성령 충만한 삶은 내가 원하는 것을 내려놓고, 성령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따라가는 삶입니다.

때로는 성령님께서 우리를 성공의 자리보다 섬김의 자리로 인도하실 수 있습니다.

인정받는 자리보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자리로 이끄실 수 있습니다.

편안한 자리보다 누군가를 품고 기다려야 하는 자리로 보내실 수도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성령님, 왜 저를 이곳으로 데려오셨습니까?”라고 묻기보다, “성령님께서 이곳에 계시다면 저도 이곳에 머물겠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야 할 것은 성령님을 통해 내가 원하는 것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께서 계신 곳에 나도 함께 있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함께 기뻐하고, 성령님께서 아파하시는 것을 함께 아파하며, 성령님께서 보내시는 곳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 하나님, 주님을 제 뜻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 여기지 않게 해 주십시오. 주님의 능력을 이용하려 하지 말고, 주님의 뜻에 순종하게 해 주십시오. 제가 원하는 자리에 주님을 붙잡아 두려 하지 말고, 주님께서 이끄시는 자리로 제가 옮겨 가게 해 주십시오. 그곳이 편안하든 어렵든, 사람들에게 인정받든 외면받든, 성령님께서 계시는 곳에 저도 머물게 해 주십시오.”

하나님을 내 삶에 끌어들이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삶 속으로 우리가 들어가기를 바랍니다.

성령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사람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께 붙들려 살아가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4. 스데반의 순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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